<그린파파야 향기>라는 영화를 아시는지요? 이 영화는 베트남 출신의 감독 트란 안 홍이 1993년도에 프랑스 자본으로 만든 영화인데요. 이 영화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만들어진지 벌써 30여 년이나 되었다니 시간이 참 빠르단 생각이 듭니다. 20대에 본 이 영화는 영상으로 접할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최고로 순수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린파파야 향기>는 영화의 제목처럼 싱그러움이 가득한 주인공 무이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특히 영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대사로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는 이미지와 음악으로 주인공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보여 주지요. 저만 이리 평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린파파야 향기>는 1993년 칸 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습니다.
어린 무이
10살의 무이는 고향을 떠나 도시의 저택 식모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곳에서 주인집 큰 아들의 친구인 쿠엔 도련님을 보고 첫눈에 반하지요. 주인집은 가세가 기울어 처녀가 다 된 무이를 쿠엔의 집 하녀로 보내줍니다. 무이는 비록 쿠엔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왔지만 그저 묵묵하게 하녀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쿠엔에게는 이미 활달한 성격의 애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용히 집을 치우고 밥을 지어 올리는 무이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게 됩니다.
무이와 쿠엔은 둘 다 말이 없는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무이는 자신의 연정을 정성스러운 식사로 표현하지요. 애인과 늘 외출하는 쿠엔은 무이가 차려주는 식사를 잘 먹지 못하죠. 쿠엔은 작곡가입니다. 그의 거실에는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가 있습니다. 작곡을 위해 피아노를 치고 있노라면 어느새 무이가 조용히 나타나 그의 주변에 있는 등불을 하나 둘 켭니다. 그럴 때마다 쿠엔은 작곡을 잠시 멈추고 드뷔시의 피아노곡인 <달빛>을 연주합니다.
말이 없는 쿠엔으로서는 말로써 사랑을 고백하는 것보다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피아노라는 매개체를 통해 마음을 드러냅니다. 아름다운 <달빛>을 듣노라면 쿠엔의 무의식은 이미 무이에게 강하게 사로잡혀 있음이 보입니다. 쿠엔에게 있어 무이는 어두운 밤하늘에 은은하게 떠 있는 달과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음악으로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감독의 섬세한 연출 덕분에 순수하고도 낭만적인 명장면이 두고두고 남게 되었습니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쿠엔
<달빛, (Clair de Lune)>은 프랑스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클로드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에 속한 작품입니다. 이 모음곡은 28세의 드뷔시가 1890년에 작곡을 시작하여 1905년에 수정 보완 후 출판한 것으로 <전주곡(프렐류드)>과 <미뉴에트>, <달빛>과 <파스피에> 등 4개의 피아노 곡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베르가마스크라는 제목은 드뷔시가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여행한 베르가모 지방에서 따 온 것으로 여행 당시의 인상을 가지고 작곡한 것이지요. 미뉴에트와 파스피에는 바로크 시대 춤곡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자 오늘날까지 많은 클래시안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곡이 바로 <달빛>입니다. 드뷔시보다 약 200년 앞서 독일인인 베토벤이 이미 <월광> 즉 달빛이라는 제목의 피아노 소나타를 만들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베토벤의 작품에는 '달빛'보다는 '월광'이 더 잘 어울려요. 물론 <월광>이라는 제목은 베토벤 사후에 붙여졌지만 제목이 같으면서 둘 다 피아노 독주곡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두 곡을 비교하게 되는데요. 두 <달빛>은 결이 참 다릅니다. 하나는 독일의 달빛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달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지하고 사색적인 독일인과 자유롭고 낭만적인 프랑스인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진달까요.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도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약간 고독하면서도 절제된 우울함이 매력입니다. 게다가 1악장은 저처럼 체르니 30번까지만 배운 사람도 연주할 수 있도록 쉽게 만들어졌지요. 아름다운데 치기도 쉽다니요! 드뷔시의 <달빛>은 베토벤의 <월광>보다 연주하기 훨씬 어렵습니다. 드뷔시의 <달빛>에 미친 듯이 꽂혔던 이십 대 초반에 이 곡을 연주하고 싶어서 거의 1년간 연습한 기억이 납니다. 피아노 전공자가 들으면 1년이나 걸렸다고 놀라실지도요. 이 곡을 너무 빨리 치게 될까 봐 하루에 딱 한 번씩만 연습했습니다. 엄청 재밌는 소설을 발견하면 왜 아껴가며 읽게 되지요. 결말이 빨리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바로 그런 심정으로 1년간 달빛을 음미하고 애정 했던 것 같아요.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친 이 후로 20여 년간 손도 대지 않았더니 이제는 전혀 칠 수 없는 곡이 되어 버렸지만요.
드뷔시의 <달빛>은 피아니스트들 역시 애정하고 많이 연주하는 곡입니다만 저는 1903년에 칠레에서 태어난 위대한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버전을 참 좋아합니다. 아라우 역시 5살에 리사이틀을 열었던 피아노 신동이었습니다. 그는 7살이었던 1911년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마르틴 크라우제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되는데요. 아라우의 재능에 놀란 크라우제가 무보수로 그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1918년에 크라우제가 사망하게 되자 이후 다른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지요. 리스트도 스승 체르니가 무보수로 가르쳤는데 리스트의 제자 역시 보수에 상관없이 어린 천재를 키워냈으니 참 아름다운 선순환인 것 같습니다.
<달빛>을 들을 때면 제 영혼이 마치 달빛이 되어 맑고 깊은 호숫가를 두루두루 쓰다듬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 곡은 반드시 밤에 들어야 합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이는 고요한 밤, 풀들이 무성하게 둘러싼 아름다운 호수가 나타납니다. 호수의 물결 위로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세상에게 인사하지요. 호숫가에는 인기척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오로지 나만이 그 아름다운 세계의 목격자입니다.
<달빛>이 만들어내는 인상은 확실히 컬러 세상은 아닙니다. 비록 흑과 백 두 가지의 색상으로만 표현되지만 부드럽고도 낭만적인 옛 흑백 영화 같달까요. 이렇게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듣노라면 그 선율이 만든 길을 영혼의 눈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시각과 청각, 촉각과 후각, 그리고 통각을 가졌지만 영혼만이 느끼는 제6의 감각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그 감각을 직관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신내림을 받은 사람의 신기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요. 정체가 무어든 간에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음악과 미술, 문학에서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기관이 영혼에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예술을 꾸준히 추구하고 지속하는 것일지도요.
클로드 드뷔시(Clade Debussy)는 1862년 8월 22일, 프랑스 생제르맹 앙레에서 태어나 1918년 만 55세의 나이로 눈을 감은 위대한 음악가입니다. '인상' 혹은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미술에서 대두되었지만 클래식 음악에 이 인상주의를 확립시킨 인물이 바로 드뷔시입니다.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 초반은 미술에서도 음악에서도 실험적인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지요. 공통적으로 모두 프랑스에서 태생되었고요. 공교롭게도 미술에서 인상주의의 시초라 불리는 작품이 바로 클로드 모네의 <해돋이, 인상>인데요. 음악에서도 클로드 드뷔시가 인상주의를 확립하였으니 두 사람의 클로드가 예술계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네요.
드뷔시를 선두로 독일로 대표되는 대륙계의 클래식 음악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프랑스 음악을 확립한 모리스 라벨, 가브리엘 포레, 뿔랑 등도 모두 드뷔시의 영향을 받았으며, 에릭 사티는 드뷔시의 친한 친구였지요. 승승장구하던 자신과 달리 평단에 인정받지 못했던 사티가 안타까웠던 드뷔시는 짐노페디를 오케스트라로 편곡하여 자신의 인지도를 통해 사티의 작품이 유명해지길 바란 일화도 있습니다.
<달빛>은 고전음악에 발을 처음 들이기에 아주 제격인 음악이기도 합니다.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고흐나 세잔, 모네를 좋아하듯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이도 이 곡을 들으면 클래식이 이토록 아름다웠는지 깜짝 놀라게 되지요. <달빛> 못지않게 진입장벽이 낮으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 또 있습니다. 바로 <꿈, Liverie>이라는 작품입니다.
드뷔시의 초기 작품에 해당하기 때문에 후기의 실험적인 작품들보다는 멜로디가 선명합니다. 사실 <꿈> 외에도 드뷔시의 피아노 소품곡들 대부분 우아하고 낭만적이지요. 어떤 곡을 소개해야 하나 고민을 정말 많이 하게 되는 작곡가가 바로 드뷔시입니다. <아라베스크>라던가 <낭만적 왈츠>도 너무 좋고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과 <바다>는 명곡 중의 명곡이지요.
위에 소개한 곡들은 드뷔시의 인상주의가 완벽하게 확립되기 전의 곡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은 드뷔시 특유의 화성과 낭만성을 보여준다면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좀 더 인상주의에 다가간 작품이지요. 그리고 이번에 소개해 드리는 곡은 인상주의가 완벽하게 확립된 느낌을 주는데요. 바로 드뷔시의 전주곡 제2권에 실린 온딘(Ondin)입니다.
드뷔시의 전주곡은 1권과 2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권마다 12개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권은 1909년에, 제2권은 1913년에 만들어졌는데요. 드뷔시가 1918년에 사망했으니 그의 후기 작품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주곡(프렐류드)은 원래 오페라나 음악을 시작할 때 그 서막을 열어주는 overview의 기능을 갖는 연주곡을 말합니다. 알레망드, 사라방드, 지그, 쿠랑테처럼 유럽의 여러 춤곡들을 모은 바흐의 영국 모음곡을 보면 제일 먼저 프렐류드가 나오는 걸 볼 수 있지요. 그런데 피아노의 시인인 쇼팽이 전주곡을 피아노 독주곡으로써 아예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켰고 드뷔시가 이를 이어받았습니다.
온딘은 물의 요정, 혹은 바다에 사는 인간형의 생물을 가리키는 말로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데 라 몬테 푸케가 1811년에 발표한 창작동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인간을 사랑하게 된 온딘은 불멸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어 그와 결혼하지만 다른 여자와 침대에 누워있는 남편을 보고 배신감에 슬퍼하며 그를 죽이고 다시 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인어공주의 하드코어 버전이랄까요.
드뷔시는 온딘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닙니다. 물의 요정이라는 정체성만 음악으로 가져왔습니다. <달빛>이 아름다운 정경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의 스케치라고 한다면 <온딘>은 물을 희롱하며 노는 인어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그에 대한 인상을 묘사했습니다. 소설도 서사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사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심리 묘사라던가 주인공의 인상에 중점을 둔 작품이 있지요.
저는 <온딘>을 들으면 인어들이 물속에서 빠르게 헤엄치다가도 물 밖으로 나와 물방울을 튀기는 모습이 저절로 연상됩니다.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이전까지의 음악과는 전혀 다른 화성을 사용한 덕분에 드뷔시의 작품은 너무나 새롭고 현대적이며 생생한 느낌을 줍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신동이었던 드뷔시는 11살에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해 피아노 연주와 작곡 부문에서 1등을 하는 수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반항아로 유명했는데요. 특히 듣도 보도 못한 화음을 작품에 넣어 교수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고 하지요. 그의 반골기질과 실험적인 성향 덕분에 당시로서는 무척 독특한 클래식을 작곡하게 되었고 현대음악과 재즈의 탄생을 예고하는 위대한 작곡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지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려면 확실히 도전적이고 반항아다운 기질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들을 때 영감을 받게 되지요. 예술가의 가장 큰 야망이자 원대한 꿈은 바로 이러한 불멸, 지속적인 영감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