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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신도 질투한 두 명의 천재

쟈클린 뒤프레와 클라라 하스킬

by 김정은

대학시절 저를 참으로 아껴주시던 은사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기에 '계셨다'라고 과거형으로 서술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못 서글퍼 오네요. 은퇴를 얼마 앞둔 노교수이자 저의 전공 교수(저의 첫 전공은 역사였습니다)였던 은사님은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해서 가끔 학생들을 자신의 연구실로 부르시곤 하셨던 자상한 분이었지요.


또 얼마나 멋쟁이셨는지 영국 옥스포드에서 방금 오신 신사처럼 트위드 자켓에 베레모를 쓰고 다니셨어요. 원래 대지주의 아들이기도 했고, 강남에서 부유하게 사는 분이라 고가의 명품 양복과 모자, 가방으로 멋을 내는 교수님을 '부르주아'라는 둥 혹은 교육하는 학자가 명품을 두르는 '위선자'라는 둥 뒤에서 흉을 보는 동기와 선배들이 몇 있었습니다. 교수님이고 학자이기에 그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 사람을 계급으로 분류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동기와 선배들을 저는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수업에도 불성실하더군요.


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가르쳤지만 중학생 시절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화가를 꿈꾸었던 교수님은 실제로 그림 대회에서 입상도 한 실력파였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로 미술을 포기하고 역사학과에 진학한 교수님은 미국 일리노이대 등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국내 소재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미술에 대한 애정이 식을 줄 몰랐던 교수님은 전공 서적 외에 국내외 화가들을 소개하거나 역사와 미술을 접목한 미술 비평서를 다수 출간하였고, 몇몇 책들은 미술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수님과 저의 인연은 2학년 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발표한 전공교양 수업 직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제 리포트와 발표가 인상적이었던 교수님은 수업시간에도 학생들 앞에서 칭찬해 주셨고 수업 후에도 저를 연구실로 따로 부르셨지요. 당시에 1학년 신입생들은 전공 교수님들마다 학생들을 나누어 개인별로 면담을 갖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이후로 교수님을 개인적으로 뵙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제 리포트가 마음에 들어 평소 친분이 있던 <로마인 이야기>를 출판한 한길사 대표에게도 리포트를 보내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다면서 연신 웃음을 지어주셨습니다. 교수님들은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멀게만 느꼈는데 교수님의 솔직하고도 소탈한 칭찬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무척 행복했습니다. 중고등학생 시절 아주 가끔 선생님께 칭찬을 받기는 했어도 대학에 와서 교수님께 칭찬을 받아 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지요.


교수님의 칭찬이 특별했던 건 제 스스로 단 한 번도 제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입학시험으로 반드시 치러야 했던 논술 쓰기는 언제나 곤욕이었고 중고교 백일장에 한 번도 글을 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글을 가지고 칭찬을 받아 본 것이죠. 교수님의 칭찬 이후로 저는 리포트를 쓸 때마다 더욱 공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리포트를 위해 관련 책은 반드시 5권씩 이상 읽었고, 만일 관련 책이 한 두권 정도일 때는 논문을 찾아 읽었지요. 그때의 독서 습관은 지금의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글쓰기에 조금 자신감을 갖게 되더군요. 교수님의 칭찬이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글을 쓰는 저도 없었을 듯 합니다.


그날 연구실에서 교수님과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진솔하게 묻고 대답해주시는 교수님의 자상한 태도에 제 마음도 활짝 열렸습니다. 제 가족이나 역사에 대한 생각, 대학 졸업 이후의 계획 등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날 이후로 교수님은 가끔 연구실로 저를 초대하셔서 교수님의 책에 직접 사인하여 선물로 주셨고, 구상 중인 미술 비평서 이야기도 들려주곤 했습니다. 그림을 사랑했던 교수님은 역사가 아닌 그림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제자가 생겨 참으로 흐뭇해하셨지요.


교수님에게 저 또한 선생님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시던 교수님은 제 클래식 이야기를 무척 즐거워하셨지요. 교수님과 저는 농담으로 역사학자와 역사학도인데 만나면 역사 이야기는 안 하고 미술과 클래식 이야기만 한다며 웃곤 했습니다. 교수님은 특히 제가 추천한 여러 연주가 가운데 영국 출신의 첼리스트 쟈클린 뒤프레와 루마니아계 유대인인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들의 연주만큼이나 인생 또한 극적인 서사로 가득했기에 '이야기가 담긴 미술'과 또 '인간의 이야기인 역사'를 사랑했던 교수님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 같아요.




쟈클린 뒤 프레는 1954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났습니다. 5살 때 런던 첼로 학교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그녀는 전설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하였습니다. 그녀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건 1962년 영국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 때문이었습니다. 이 연주는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이후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뒤프레를 대표하는 레퍼토리가 되었지요. 이후 1965년 이 곡을 EMI와 작업하면서 그녀는 음반계 대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자클린 뒤프레

자클린 뒤프레라는 대스타의 탄생은 영국인들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주었습니다. 영국은 거대한 식민제국을 건설하고 스스로 대영제국이라고 칭해 왔지만 클래식 음악 쪽으로는 프랑스나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에 비해 변방에 해당했습니다. 물론 독일 출신의 헨델과 멘델스존, 오스트리아 출신의 하이든이 영국에서 활동을 하긴 했지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아니지요. 영국 출신의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로는 헨리 퍼셀, 본 윌리엄스, 에드워드 엘가, 벤저민 브리튼, 홀스트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곡가들은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다 아는 바흐나 베토벤, 쇼팽, 리스트 정도의 지명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 출신의 연주가 역시 다른 나라에 비해 많지 않습니다. 당장 생각나는 유명 연주가로는 안드라스 쉬프, 예프게니 키신, 외젠 달베르 등이 있네요.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영국의 자존심인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청중을 휘어잡은 뒤프레의 출현은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드높여 주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미국에서도 데뷔한 뒤프레는 미국 청중의 마음도 사로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반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어요. 바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입니다.


젊은날의 뒤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


유대인인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휘계의 신이라 할 수 있는 푸르트뱅글러에게 피아노 연주로 인정받은 천재 소년이었습니다. 마르케비치 음악 학교에서 지휘법과 피아노, 실내악을 배운 바렌보임은 유럽의 여러 곳에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바렌보임의 지휘 곡들은 들어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그의 피아노 연주는 잘난 척을 잘하고 오만했던 그의 인성과 반대로 우아하고 균형 잡혀 있어 당황하게 됩니다.


클래식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 클래식 고수였던 회원분에게 다니엘 바렌보임이 연주하는 쇼팽 녹턴에 빠져 있다고 하자 그런 개차반 같은 놈의 연주를 왜 듣냐고 한소리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훌륭한 연주에도 불구하고 많은 클래시안들에게 나쁜 놈으로 찍힌 인물이지요.


1966년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뒤프레를 만난 바렌보임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는데요. 연주에 있어 완벽주의를 추구한 바렌보임으로서는 본능적인 연주를 하는 뒤프레에게 자신에게는 없는 야성미를 느낀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바렌보임은 뒤프레의 연주에 대해 '그녀의 음악은 자연과 같다'라고 평했으니까요. 그녀가 연주하는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들으면 바렌보임의 심경이 이해가 가실 겁니다.


자클린 뒤프레, 에드워드 엘가 첼로 협주곡 https://www.youtube.com/watch?v=UUgdbqt2ON0


지극히 제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피아노나 바이올린은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연주하면 피로감을 느끼지만 첼로는 깔끔하고 정확하게 연주하면 오히려 매력이 반감되는 것 같아요. 로스트로포비치, 다닐 샤프란, 파블로 카잘스 등 세계적인 거장 첼리스트들이 있지만 저는 뒤프레와 장한나의 연주를 가장 좋아합니다. 뒤프레와 장한나의 연주 모두 열정적이고 야성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첼로에 자신들의 혼을 갈아 넣는 것 같지요. (장한나의 넘버원 연주는 뒤에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뒤프레는 연주만 잘하는 천재였던 것 같습니다. 산수도 집안일도 잘 못하고 악보도 잘 못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리트 유형의 천재 바렌보임을 무척 사랑하고 의지했다고 하지요. 뒤프레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바렌보임과 결혼하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까지 합니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신경질적이고 강압적인 남자였던 모양입니다. 빡빡한 스케줄로 몸이 아파 뒤프레가 자신의 남편에게 힘들다고 호소하면 화를 내는 바람에 아파도 표현을 잘 못했다니 말입니다.


그러던 중 뒤프레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연주가에게 가장 혹독한 불치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걸리고 만 것이죠. 다발성 경화증이란 중추신경계에 발생한 염증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2배 더 발병할 확률이 높고 동양인이나 흑인에게서는 발생률이 낮으나 유럽계 백인들은 흔하게 발생한다고 합니다. 초기에 확인하면 호전되는 경우도 있지만 신경이 고장 나는 것이라 실명, 운동 장애 및 신체의 마비를 유발하게 되지요.


그렇게 투병하는 중에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휘자로서 승승장구하다가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져 뒤프레를 버리고 외도로 아들까지 낳습니다. 그런 사실을 뒤프레에게 숨긴 채 이혼을 요구하기까지 하지요. 뒤프레는 투병 생활 14년 만인 1987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가 떠난 후 바렌보임은 그 피아니스트와 곧장 결혼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은 바렌보임이라면 치를 떱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연주를 한다 한들 인성이 쓰레기이기 때문에 그의 음악의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천사 같은 외모를 가졌던 클라라 하스킬(Clara haskil)은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입니다. 1895년 1월 7일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난 하스킬이 얼마나 신동이었는가 하면 5살 때 부쿠레슈티 음악원의 교수가 그녀의 집에 방문하여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꼬마 하스킬이 듣자마자 즉석에서 한음도 틀리지 않고 연주했다고 합니다. 곧이어 같은 작품을 다른 음계로도 연주했다고 하는데 이때 그녀는 피아노를 배우지도 않은 상태였지요. 영화 <어거스트 러쉬>에서 주인공 어거스트가 기타를 배운적도 없는데 핑거 스타일 주법으로 기타를 즉흥으로 연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을 보던 제 남편이 세상에 저런 거짓말이 어딨느냐며 혀를 찼는데요. 그 거짓말 같은 천재가 바로 하스킬이었습니다.


7살이 된 하스킬은 빈으로 가 피아노의 거장 알프레드 코르토에게 배우게 되는데요. 코르토는 그녀를 가르친 지 석 달 만에 더 가르칠 게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스킬은 입학 4년 만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모두 수석으로 파리 음악원을 졸업합니다. 이후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같은 거장들과 함께 연주하면서 세계 무대에 깜짝 등장한 혜성이 되지요.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은 이런 말도 남겼어요. "살면서 세 명의 천재를 만났는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윈스턴 처칠, 그리고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클라라 하스킬


신도 질투할 만한 재능과 지성,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춘 하스킬에게 불행의 그림이 드리운 때는 불과 18세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하스킬 역시 뒤프레와 같은 다발성 경화증을 진단받게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척추 교정을 받으며 투병하지만 그녀의 등은 점점 굽어져 갔고 결국 꼽추가 되고 맙니다.


그녀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4살때 아버지를 여읜 하스킬은 자신을 돌보던 어머니마저 23살에 잃게 됩니다. 또 유대계였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2차 대전중에 스위스로 망명을 가야 했지요. 그리고 뇌와 척수에 종양이 생겨 대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괴롭혔던 약한 육체는 그러나 그녀의 정신까지 갉아먹지는 못했습니다. 1947년 재활에 성공한 하스킬은 다시 연주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녀가 사망한 1960년까지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이어갑니다. 이 시기에 많은 명연주를 녹음했는데 특히 바이올리니스트 아르투르 그뤼미오와 듀엣으로 녹음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는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지요.


사교적이지 않아 연주 활동 외에는 조용히 은둔하며 고양이와 평생을 살았던 하스킬에게 음악과 고독만이 유일한 연인이었습니다. 하스킬에 관한 책이나 관련 정보를 아무리 뒤져도 그녀가 연애를 했다는 글은 읽어 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를 모차르트의 연인이라고 불러주고 싶어요. 그녀가 남긴 모차르트 연주를 들으면 순수함과 영롱함, 청순함과 이성적인 열정이 느껴집니다. 그녀는 연주에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오롯이 음악만을 나타냈지요. 모차르트 외에도 그녀가 연주한 슈만과 스카를라티 작품들도 무척 좋아합니다.


66세의 생일을 얼마 앞두고 다음날 있을 그뤼미오와의 연주를 위해 브뤼셀에 도착한 하스킬은 지하철에서 내린 후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만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굴러 머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되지요.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지 하루 만에 하스킬은 다음날 아침 숨을 거두게 됩니다.


신은 왜 그녀를 죽을 때까지 괴롭혀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노화로 인한 자연사를 약한 몸을 가진 그녀가 견딜 수 없었기에 이 또한 신의 배려였을까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살라는 신의 의지였을까요.


화가로서 타고난 재능을 가졌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학자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은사님은 행복했으나 불행하기도 했던

이 두 연주가를 무척 안타까워 하셨어요. 그런 그들이 남긴 음악의 유산을 보물처럼 귀히 여기셨지요.


언젠가 교수님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KBS 클래식 FM 오전 프로그램이었던 가정음악에 출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애청자였던 저는 그날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출연에 깜짝 놀라고 또 반갑기 그지 없었지요. 교수님의 책 이야기를 끝낸 후 진행자가 교수님께 듣고 싶은 클래식 음악을 요청하자 교수님은 쟈클린 뒤프레가 연주하는 '쟈클린의 눈물'을 듣고 싶노라며 아름다운 연주와 달리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녀를 기리고 싶다고 하셨죠. 그 말을 할 때 교수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물기어린 음성에서 그녀의 재능을 질투한 운명의 신에게 왜 그리 가혹하게 군 것이냐고 토로하는 한 사람의 안타까운 외침이 들리는 듯 했달까요.

평범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과 비범하지만 뼈를 깎는 불행을 견뎌야 하는 삶, 과연 두 삶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이냐고 신께서 물으신다면 선뜻 선택하지 못할 것 같긴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나요?



클라라 하스킬, 모차르트 작은 별 변주곡(원제는 '아 어머니께 말씀드리죠'에 의한 12개의 변주) https://www.youtube.com/watch?v=d3O-gIqJ0Tc


클라라 하스킬, 스카를라티 피아노 소나타 https://www.youtube.com/watch?v=2xE4RzNiQWo









* 자클린 뒤프레와 클라라 하스킬의 일생에 관한 정보는 검색을 통해 나무 위키, 위키백과, EBS 지식 e 채널과 여러 기사들에서 얻은 정보를 종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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