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대기를 달뜨게 하는 가랑비가 내릴 때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제 머릿속에 반사적으로 어떤 냄새가 떠올려집니다. 불행에도 냄새가 있다면 아마도 눅눅한 공기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던 개털의 누린내와 비슷할 거라고... 지난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이 낳고 키우던 일상에는 늘 비 맞은 개의 추레하고 역한 냄새가 함께 했으니까요.
섬마을에서 서울의 달동네로 이사한 우리 가족은 한동안 반지하에서 살았습니다. 처음에 살았던 반지하 집은 겉보기에도 꽤 낡았던 빌라형의 주택이었는데 창틀이 휘어져 창문이 딱 들어맞지 않았고, 문틀의 나무들도 낡아 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지요. 시골에서 갓 올라온 순진한 가족이 이제 막 서울에 적응하려는 모습과 닮았달까요. 부엌에 놓여 있던 연탄보일러에서 가끔 연탄가스가 새어 나와 가족들이 두통을 앓을 때 엄마는 가족들에게 김칫국물을 떠 주었습니다. 연탄가스처럼 살금살금 교활하게 다가오는 불행 앞에서 당당한 수문장처럼 가족을 지키던 어머니가 없었더라면 우리 가족은 발에 차인 연탄재처럼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의 서울은 연약한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었습니다.
6~7채의 빌라와 단독주택이 모여있고 그 가운데에 널찍한 시멘트 바닥의 광장이 있던 동네 중앙에 자리 잡은 덕에 사람들의 발걸음과 창문 높이가 같던 우리 집 안방 창문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어요. 동네 못된 꼬마들이 잠기지 않는 창문을 함부로 열어 수박껍질이나 쓰레기를 집어던지며 낄낄 거리기도 했던 그 집에서의 좋은 추억을 만들 새도 없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갔지요. 좀 더 깨끗한 새 건물이 많은 아랫동네로 옮겼지만 지하의 깊이는 여전했습니다.
이사 간 집의 안방 창문을 열면 창문 턱과 주인집 1층 마당의 높이가 같아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바닥을 마주할 때의 난감함과는 다른 당황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창문 바로 앞에 주인집에서 키우는 진돗개 집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람 좋은 주인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부지런해서 개가 똥오줌을 쌀 때마다 물청소를 했지만 시멘트 바닥, 채 마르지 않은 물 비린내와 오물의 잔향이 후각에 예민한 어린 저에게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특히 비가 내린 후에는 어김없이 개의 털 누린내와 오줌 지린내가 방안 가득 풍겨 왔지요.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 때면 훅 하고 들이닥치는 개의 누린내와 비린내는 제게 곧 가난의 냄새였어요. 막을 수도 없어 그저 황망히 들이마셔야 했던 역한 냄새는 어린 저에게 뜻 모를 서러움으로,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울고 싶게 만들었달까요.
시골에서의 삶은 비록 가난했을지언정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고 순박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했기에 단 한 번도 불행을 느껴보지 않았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가난은 시골과 달리 사람을 불편하고 부끄럽게 만들더군요. 게다가 희고 포동포동한 피부를 가진 서울 아이들 옆에서 자신이 얼마나 새까맣게 그을리고 빼빼 마른 촌뜨기인 줄 깨닫게 된 아이는 자꾸만 움츠러들었지요. 예민한 감각 때문에 서울 살이가 더욱 힘에 부쳤던 어린이의 마음에는 빛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 셋방처럼 그늘이 번져 갔습니다. 먹고살기에 바빴던 부모님은 어린 소녀의 우울을 눈치 채지 못할 수밖에 없었지요.
영국의 작가 시릴 스콧은 어느 클래식 작곡가에 대하여 "아이의 영혼을 가진 진정한 시인"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아이의 영혼을 가진 시인이라니...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의 음악은 어떠하기에 이렇게 정의한 걸까요.
그는 바로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독일 출신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입니다. 제 20대에는 오로지 브람스와 프랑스 작곡가들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슈만은 그다지 이목을 끄는 작곡가는 아니었습니다. <호두나무>라는 아름다운 가곡을 만든 작곡가, 브람스를 세상에 알린 고마운 사람, 그리고 클라라라는 재능 있고 아름다운 여인의 남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요.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게 된 계기는 영화 <샤인> 때문이었습니다.
<샤인>은 데이비드 헬프갓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실화를 그린 영화입니다. 또, 주인공이 그토록 정복하고자 원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숨은 주인공입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를 모두 마친 데이비드는 그대로 쓰러지고 정신병원에서 오래 요양해야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그의 정신병의 주된 원인을 아버지의 학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만의 강압적인 방식으로 피아노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허리띠를 풀어 매질을 하곤 했지요. 아버지를 떠나 음악학교에 들어간 데이비드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인 라흐마니노프 3번에 집착하며 애정결핍을 채우려 노력합니다.
영화 초반, 데이비드의 음울한 어린 시절이 묘사될 때 어떤 피아노 곡이 흘러나옵니다. 영화 장면의 배경음악인 그 곡을 듣는 순간 저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느끼고 기억하던 유년의 정서가 그 음악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습니다. 나 조차도 정의하지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했던 나만의 감정을 그토록 정확하게 반영하는 음악이라니! 슈만의 <어린이 정경> 제10곡 Fast zu erns(약이 올라서)에서 느낀 동질감 때문에 작곡가 슈만에게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지요. 그렇게 <어린이 정경>이라는 음악을 통해 슈만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린이 정경>은 슈만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1838년에 작곡한 작품으로 13곡을 함께 모아놓은 모음집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모음집은 꼭 한 권의 사진 앨범 같습니다. 오래된 앨범을 펼치면 과거의 내 모습과 가족, 친구 그리고 나를 둘러싼 정경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진을 보며 비로소 이땐 이랬지, 그땐 그랬구나를 연발하며 추억에도 잠기고요.
<어린이 정경>이 꼭 그렇습니다. 제1곡부터 제13곡까지 감상하고 있노라면 내 유년의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르게 되지요. 사람의 기억은 과연 사건 중심일까요. 아니면 그때 느낀 감정 중심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 강렬한 기억은 대부분 당시에 느낀 감정, 즉 정서인 것 같습니다. 오래된 기억일수록 더욱 그러하지요. 슈만 역시 저처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그린 유년의 풍경은 사건의 묘사가 아닙니다. 어린이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며 정서를 환기시키죠. 물론 그가 찍고 현상한 사진에는 슈만 특유의 낭만적인 필터가 더해졌지요.
<어린이 정경>
제1곡「미지의 나라들 Von fremden Ländern und Menschen」
제2곡「이상한 이야기 Kuriose Geschichte」는
제3곡「술래잡기 Hasche-Mann」
제4곡「졸라대는 어린이 Bittends kind」
제5곡「만족 Glückes genug」
제6곡「큰 사건 Wichtige Begebenheit」
제7곡「꿈 Traümerei」
제8곡「난로가에서 Am Kamin」
제9곡「목마의 기사 Ritter vom Steckenpfed」
제10곡「약이 올라서 Fast zu ernst」
제11곡「거짓말 Fürchtenmachen」
제12곡「어린이는 잠잔다 kind im Einschlummern」
제13곡「시인의 이야기 Der Dichter spricht」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라 칭송받는 호로비츠는 1987년 미국 에이버리 피셔 홀에서 자신의 마지막 공연을 합니다. 1903년생이시니 이때 그의 나이 85세였습니다. 그는 이 마지막 공연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함께 <어린이 정경> 제7곡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합니다. 그의 아련한 트로이메라이는 이날 청중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은퇴 공연에서 85세의 대가는 왜 이곡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리고 청중들은 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요. 피아니스트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린 호로비츠는 커리어로서의 꿈을 다 이뤘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는 잊고 싶지 않은 유년의 꿈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연주를 들은 청중들은 그의 꿈속으로 초대받고 그곳에서 자신들만의 노스탤지어를 잠시 동안 만난 것 같아요.
* 주: 2011년 호주 라임라이트 매거진에서 유명 피아니스트를 대상으로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뽑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1위는 라흐마니노프, 2위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3위는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 4위는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5위는 에밀 길레스였습니다
소통과 공감.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꿈꾸는 궁극의 연주란 바로 소통과 공감이 아닐런지요. 그렇기에 호로비츠는 전설적인 연주가로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
<어린이 정경> 모음곡이 무엇보다 좋은 이유는 '어린이 다움'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어린이에 관한 음악을 만든다면 천진난만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야 할것 같은 고정관념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동화를 봐도 그렇지요. 그런데 전 지나치게 예쁘고 이상적인 어린이상을 그린 동화를 보면 약간 거부감이 듭니다. 어른들이 '무릇 어린이라면 이렇게 곱고 순수하게 생각해야 하는 법이다'라고 강요하는 것 같달까요. (이런 딴죽은 제 어린 시절이 마냥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시절이 아니었기에, 아마도 자격지심이 발동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슈만은 그러지 않더군요. 어린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작품 속에서 강요하거나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슈만에게는 9명의 자식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같아요. 호기심 많고 이야기를 좋아하며 때론 거짓말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홀로 시무룩한 아이들의 세계를 말이지요. 또, 그는 어린아이에게도 어른 못지않은 멜랑콜리가 있다는 것도 알았던 듯 해요. 어린아이에게도 그들만의 세상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있을 것입니다. 7살은 7살만 치의 아픔이, 10살은 10살 만 치의 아픔이 분명 존재할 겁니다. 그 아픔이 비록 어른의 시각에서는 사소하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 순 있겠지만 40살이 되어도 자연재해처럼 갑자기 닥치는 고통과 슬픔에 어디 내성이 생기던가요. 다들 그저 견디는 것뿐이지요.
슈만은 평생 양극성 질환(조증과 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들어보면 그의 조증과 울증이 이해 가기도 합니다. 그가 만든 곡들은 서정적이면서 매우 낭만적입니다. 감수성이 여리고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지지요. 한편으로는 안개에 휩싸인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 드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런 곡을 들으면 슈만의 우울이 선명하게 보이지요. 그에게 세상은 정답이 없어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적응되지 않는 수수께끼 미로였던 것 같습니다.
슈만에게는 아름다운 작품도 많고 재밌는 일화도 많습니다. 그의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에 들려 드릴게요. 오늘은 그저 <어린이 정경>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곡은 전체 길이가 피아니스트에 따라 약 17분에서 22분으로 길지 않습니다. 한곡당 2분 내외로 짧지요.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피아노 소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어린이 정경>을 들으며 노스탤지어에 잠시 젖어보는 건 어떠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