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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갈망한 수줍은 청년의 탄식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환상곡 D.940>

by 김정은

한국 드라마가 지금처럼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데에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중요 모멘텀이 되어준 것은 아무래도 '종편(종합편성 채널)'의 시작과 케이블 채널의 다양화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종편 4사(TV조선, MBN, 채널A, JTBC) 중 JTBC와 드라마 전문 케이블 채널인 TVN, 영화 주력이지만 가끔 장르 드라마도 만드는 OCN 덕분에 다양하고도 실험적인 드라마들이 지난 10여 년간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으니까요. 넷플릭스 등 OTT 시대를 맞아 한국 드라마의 위상은 이제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한때 미드와 영드, 일드 마니아였던 저로서는 K-드라마가 더 재미있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JTBC가 개국하면서 특별기획으로 방영했던 드라마 <밀회>는 <나의 아저씨>, <시그널>, <미생> 그리고 <응답하라> 시리즈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중 하나입니다. <밀회>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과 불륜이라는 소재 때문에 이 드라마를 외면하는 시청자들이 있었습니다만 '사랑이란 사람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 무엇'이라는 주제를 아름다운 음악과 뛰어난 연기로 잘 전달한 명작이었지요.


예술재단의 기획실장인 마흔 살의 혜원(김희애 분)은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우아하고 똑똑한 여성입니다. 음대 교수를 남편으로 둔 혜원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재단 이사장과 그의 남편인 회장의 더러운 뒷일을 처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남자 주인공 선재(유아인 분)는 퀵서비스를 하는 스무 살의 청년입니다. 선재는 타고난 피아노 천재입니다만 가난한 홀어머니를 모시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갈 뿐이지요. 혜원의 남편 준형이 우연찮게 선재를 발굴하면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지요.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준형은 혜원에게 선재를 보내 오디션을 보게 합니다. 혜원의 피아노가 놓인 방에서 선재가 처음 연주한 곡은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이었습니다. 이후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1번>과 리스트의 <파가니니 대연습곡>,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번>,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4월> 등을 차례대로 연주하게 되지요. 선재의 연주를 듣던 혜원은 뒤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혜원의 감동은 단순히 천재를 만난 기쁨을 넘어 그녀가 잊고 있던 음악의 아름다움 자체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연주가 끝난 후 선재는 혜원에게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을 함께 연주해 달라 청합니다. 실제로 이 곡은 두 명이 피아노에 나란히 앉아 치는 연탄곡입니다. 선재의 부탁대로 두 사람은 같이 연주를 하는데 저는 이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소 구슬프고 외로움만이 가득 느껴진 슈베르트가 이렇게 농염할 수 있다는데 깜짝 놀란 것이지요.


극 중에서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혜원과 선재지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간만큼은 동등합니다. 음악 안에서는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중요하지 않지요. 오롯이 음악으로만 두 사람은 노래하고 대화합니다. 그리고 음악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작가가 왜 이 장면에 슈베르트의 곡을 넣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슈베르트의 격정과 울분을 <밀회>의 작가는 알고 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곡이 얼마나 섹시한 지도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x_u1jrBJGDs&t=71s


슈베르트와 드라마 속 선재는 많이 닮아 보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잘 알지 못했던 수줍고 순수한 선재는 곧 슈베르트 그 자신입니다.


1797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19일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안타까운 작곡가입니다. 아마도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불운한 음악가를 꼽으라고 하면 1등은 슈베르트일 겁니다. 흔히 '가곡의 왕'으로 알려져 있는 슈베르트는 실제로 약 630여 개의 가곡을 만들었지만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나 <미완성 교향곡>, 현악 4중주인 <죽음과 소녀> , 피아노 5중주 <송어> 등 피아노와 관현악 작품도 꽤 만들었습니다. 10대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던 슈베르트는 죽을 때까지 998개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보다 1.8배 많은 양이기도 하지요.


160센티미터가 되지 않는 작은 키에 외모도 볼 품 없던 슈베르트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남자였습니다. 여자들에게 인기도 없었지요. 그래서인지 슈베르트는 자신감도 퍽 부족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악상이 그를 사로잡아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생전에 출판된 작품 수는 적었고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경우도 드물었습니다. 친구들 모임에서 연주하기는 좋아했지만요. 자기 자신을 대중 앞에 적극적으로 포장하고 과시했던 리스트와는 정 반대의 인물이지요. 슈베르트 스스로도 자신을 작곡가이지 연주가로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널리 알려진 것은 로베르트 슈만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사후에 슈만은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널리 알려 슈베르트가 재평가되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고 합니다. 슈만은 정말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쇼팽과 슈베르트, 브람스를 세상에 알리는데 노력한 인물이었으니까요. 슈베르트의 작품이 무시받던 러시아에서도 그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피아니스트가 바로 리흐테르입니다. 자기 자신보다 음악을 더 중시 여기는 사람들 덕분에 아름다운 음악이 묻히지 않는 것을 보면 세상은 역시 사람들의 선의와 순수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음악가가 되기 전에 아주 잠시 동안 학교 선생으로 지내기도 했지만 음악 가정교사나 개인 레슨을 하며 평생 방랑자처럼 전전했던 슈베르트는 늘 가난에 시달렸다고 하지요. 심지어 죽기 1년 전에야 비로소 피아노를 장만했다고 해요. 그 전에는 기타로 작곡을 했다고 하니 정말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젊은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샛말로 안습)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살아갔던 슈베르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매독이라는 주장도 있고 티푸스라고도 추정)으로 서른한 살이라는 한창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슈베르트가 만일 요즘 세상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요. <밀회>의 주인공 선재처럼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도 밤이 되면 자신의 피아노를 가지고 창작을 했겠지요. 그리고 조금 자신 있는 창작품을 유튜브에도 올렸을 겁니다. 선재처럼 자신의 얼굴은 가린 채로 말이죠. 수줍음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요즘 같은 온라인 세상이 썩 괜찮은 것도 같습니다. 온라인상에서 슈베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봐 주는 팬덤이 점차 생겨나 소위 '대박'을 쳤을지도요. 사후에 유명해진 예술가를 보면 마음이 참 아파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반 고흐도, 소와 어린이 그림으로 유명한 이중섭도 사는 동안은 가난하고 외로웠지요. 슈베르트는 그래도 이 들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나았지만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2, 대혼돈의 멀티버스>에서 2개의 평행우주가 서로 충돌하는 인버전(Inversion) 현상이 나옵니다. 두 우주가 충돌하는 대 이벤트는 두 세상 모두를 종말로 만드는 최악의 사건이었지요. 하지만 평행우주의 인버전보다 더 큰 이벤트가 있습니다. 바로 '만남'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더 큰 사건을 저는 감히 상상하지 못하겠습니다.


선재는 혜원을, 혜원은 선재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두 사람의 세계에 가장 큰 사건이 됩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피아노 교육을 받아 본 적 없던 가난한 청년 선재는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봐 준 혜원을 만납니다. 그는 처음으로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요. 재능이 의미가 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알아봐 준 사람, 내 음악을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 그것만으로 선재는 충분했습니다. 가난했으며 조금은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가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지요.


쇼윈도 부부였던 혜원은 남편에게서도 자신의 상사들로부터도 진심 어린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한때 재능이 있었으나 건초염을 제 때 치료하지 못해 피아노를 포기합니다. 그 후로 부자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채우지 못한 결핍을 채우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오지요. 하지만 선재의 더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을 받은 혜원은 비로소 자신의 결핍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해주지 못했기에, 스스로를 사랑으로 대접받아 마땅하다고 인정한 적이 없기에 그녀가 재벌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그들이 주는 콩고물로 상류층 인양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슈베르티아데의 모습

음악가로서는 불운했던 슈베르트였지만 그의 삶 내내 춥고 외로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슈베르트 또한 좋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10대 시절 같은 학교에서 만난 친구 슈파운은 아버지의 반대로 작곡을 할 수 없었던 슈베르트에게 오선지를 사다 줍니다. 또 슈베르트의 악보를 본 살리에르(모차르트 라이벌의 대명사인 바로 그 살리에르)는 그의 재능에 놀라 작곡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스무 살이 된 슈베르트는 당시의 유명한 성악가 포글을 만납니다. 포글은 슈베르트 가곡의 아름다움에 반해 남은 평생 그의 가곡을 알리는데 힘썼습니다. 또 슈베르트의 재능과 딱한 사정을 잘 알던 친구들이 슈베르트의 후원모임인 '슈베르티아데(Shubertiade)'를 만들었지요.


비록 슈베르트가 생전에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왕실이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친구들의 지원을 받아 작곡했고 발표 역시 슈베르티아데에서 했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그의 음악에는 '젠체'함이 없습니다. 음악에 귀족들이 좋아하는 '권위'와 '품위'를 담는 대신 소박하고도 순수한 열정을 담아내었지요. 슈베르트의 가곡을 듣노라면 청순함과 청아함에 푹 빠지게 되니까요.


슈베르트가 죽던 해에 완성한 <네 손을 위한 환상곡, 작품번호 940번>을 감상하노라면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슈베르트의 가슴속에 뜨거운 활화산이 존재했음을 느낍니다. 슈베르트도 한 남자로서 한 여인을 만나 진심 어린 사랑을 주고 또 받고 싶었을 겁니다. 두 개의 세계가 '인버전'하는 대 사건을 그 또한 갈망했을 겁니다.


오스트리아의 수줍은 한 청년의 탄식은 그렇게 예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그 청년은 환생하고 또 환생할 것입니다. 이 음악을 듣는 지금 슈베르트가 제게 물어봅니다.


"진흙 속에서 숨은 진주를 찾듯 지저분하고 비열한 세상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을 당신은 만났는지...?"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환상곡 작품번호 940번>, 예프게니 키신과 제임스 레바인의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v6VK-Fl2YC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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