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서 주로 쓰이는 심상(心象)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마음 상태'라던가 '감정'과 뜻이 비슷한 듯 하지만 심상은 뭐랄까... 좀 더 명징하고 단아하지요. 상(象)이라는 한자어의 뜻이 눈으로 본 물체나 존재의 모습이니까 심상(心象)을 '마음으로 본 형상' 혹은 '마음에 비친 존재' 쯤으로 해석하면 될까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심상이란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네요. 저는 'an image in the mind' 혹은 'a mental picture'라는 영어 표현이 좀 더 쉽게 다가옵니다. 'a condition in the mind'나 'a mental condition'이 아니기에 '심상'과 '감정'은 닮은 듯도 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지요. 심상이 '나(Myself)'라는 거울에 투영된 사물이나 사건의 이미지라면 감정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투영된 사물과 사건이 불러일으킨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이 예술을 추구하는 주된 이유는 창작을 통해 자신의 심상을 표출하고픈 욕구와 타인에게서 자신과 공통되는 심상을 발견하고 싶은 욕구,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예술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바로 공감이지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수 없는 근본적인 고독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인간을 절망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런데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예술 작품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느끼는 공감은 인간에게 개인적으로는 위로를, 사회적으로는 연대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하게 되는지요. 익명의 사람들이 쓴 글을 읽고 저 역시 익명으로 글을 쓰는 브런치에서도 비슷한 공감과 연대감을 많이 느낍니다.
예술은 결국 운명이라는 자기만의 거대한 텍스트 속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 존재가 주는 근원적 외로움에 조금이라도 익숙해지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평범한 머리를 가진 저로서는 수능과 취업 준비를 할 때 텍스트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번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천재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통 사람인 저는 그저 이해되지 않는 지식이 있을 때 반복적으로 읽고 또 읽어 그 지식을 내 두뇌가 익숙하게 느끼도록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낯선 지식과 타인, 그리고 사건을 이해한다는 건 그것을 반복적으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익숙해졌다는 뜻이니까요.
과학이 인간을 포함한 자연 현상의 원인과 이유를 규명하는 일이라면 예술은 인간 그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현상 그 자체가 각자의 마음속에 투영된 심상을 표출하는 일 같습니다. 타인이 만든 음악이나 미술, 문학 등 다양한 예술 장르로 묘사된 심상에서 동질감을 느낄 때 감상자는 크게 감동받습니다. 제게는 감동이란 곧 위로 같아요.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고 시와 소설을 읽는 주된 이유는 물론 순수한 '재미'도 있지만 타인이 그려낸 심상과 내가 그려낸 심상이 비슷한 작품을 발견할 때의 짜릿함과 감동에 중독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클래식에는 인간의 어둡고 우울한 내면을 표현하는 음악이 참 많습니다. 어떤 음악은 끝이 안 보이는 깊고 어두운 동굴 속을 헤매는 까마득함을, 또 어떤 음악은 안개를 헤치며 간신히 간신히 걸어왔는데 어느 순간 발끝에 절벽이 펼쳐졌을 때의 그런 절망감을 노래합니다. 음악가가 그린 이별의 아픔, 사별의 고통, 민족의 고난 등 절망의 범위와 종류도 다양하지요.
그런데 이런 곡을 들으면 서글프고 서러워져 함께 울고 싶기보다는 희한하게 위로가 됩니다. 수 백년, 수 십년전에 태어난 이 음악가도 나처럼 영혼이 피폐하고 황량할 때가 있었구나, 내가 느껴본 절망이 나만의 것은 아니로구나,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외로움과 슬픔,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구나... 나는 혼자가 아니로구나...라는 적적한 안도감 때문이지요. 음악가들이 그려낸 자기만의 심상에서 공통점을 만날 때 나는 그들과 마치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듭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음악이라는 매개체로 나누는 소통, 음악을 듣는 가장 큰 이유이겠지요.
러시아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작곡가 중 한 명입니다. KBS 클래식 FM에서는 해마다 청취자를 대상으로 클래식곡 선호도 조사를 하는데요. 2015년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에서 1위를 한 작품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이었습니다. 2021년에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가 1위를 탈환했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은 4위였지요. 하지만 올해 6월 임윤 찬 피아니스트 때문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 대히트를 쳤기 때문에 내년에는 다시 라흐마니노프가 1위를 재탈환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무척 좋아합니다. 특히 그가 18세에 작곡한 환상 소품집 작품번호 제3번의 2, 프렐류드(부제, 모스크바의 종)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곡 중 하나인데요. 십 대의 나이에 만들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고 장중한 절망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모스크바의 종'이라는 제목이 조금 의아하지만 모스크바라면 종소리조차도 이렇게 비극적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모스크바라는 도시 자체가 주는 이미지들, 예를 들어, 눈으로 뒤덮여 있는 회색 도시와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거리, 그곳을 지나가는 검은 장례 마차, 오래된 성당 꼭대기에 놓인 크고 묵직한 종, 검은 사제복을 입은 늙은 수도승들과 울고 있는 여자들, 장례 행렬을 지켜보는 까마귀들 같은 장면이 영화처럼 펼쳐집니다.
아마도 이 장례는 평범한 이를 위한 것은 아닐 겁니다. 힘없고 가난한 민중을 구원하기 위해 애썼던 한 영웅의 죽음으로 세상은 비통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이 모스크바의 종을 들을 때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림이 있습니다. 빛의 화가라 불리는 렘브란트 말년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침통한 죽음의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예수의 죽음이 아닐까 싶어요. 그가 진짜 신의 아들인지, 혼인 파티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고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오천명을 먹인 성경 속 기적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전하며 부자들과 성직자들의 위선 앞에서 불 같이 화를 내고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죄 있는 자가 먼저 치라'며 죄인과 소외된 자와 가난한 자를 가장 사랑했던 '민중의 영웅', 하지만 민중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살인자와 같이 서른셋의 나이에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한 청년의 일생은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어도 충분히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지요.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1651
라흐마니노프가 '이곡은 슬픈 노래입니다'라고 제목을 붙인 피아노 곡이 있습니다. 피아노 환상 소품집 작품번호 제3의 1번인 '엘레지'입니다. 엘레지는 우리말로 비가(悲歌), 즉 슬픈 노래로 라흐마니노프가 1892년 자신의 스승인 아렌스키에게 바친 환상 소품집의 첫 번째 곡이지요(모스크바의 종이 환상소품집의 두 번째 곡입니다). 그런데 '모스크바의 종'을 들은 후 이 엘레지를 들으면 이 슬픔은 도리어 말랑말랑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엘레지가 한 개인으로서의 슬픔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면 모스크바의 종은 비탄 그 자체이기 때문이지요.
동정심만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기에 그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 휴머니즘을 실천했던 이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으로 치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었던 이들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 때, 그러한 죽음을 막을 수 없는 무력감 앞에서 인간은 절망을 느낍니다. 그런 슬픔을 라흐마니노프가 대변하듯 한 음 한 음 절망을 향해 절규하는 모스크바의 종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약간의 위로를 얻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가 희망 앞에서 무너진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운명 공동체의 절망을 표현했다면 프레데릭 쇼팽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28번의 4는 쇼팽 자신에게서 파생된 개인적인 절망 같습니다. 쇼팽의 곡은 마치 뜨거운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무너져 버린 한 영혼을 마주한 기분이 듭니다. 이 프렐류드 28의 4번은 실제로 쇼팽의 요청에 따라 그의 장례식날 울려 퍼진 곡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장례식에 연주해달라고 할 만큼 쇼팽 개인적으로도 이 곡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듯합니다.
전주곡이라고 해석되는 프렐류드는 소설의 프롤로그처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려주는 '미리 보기'와 비슷하다 보시면 됩니다. 프렐류드는 그 자체로 독립된 음악 형식이기보다는 여러 모음곡에서 맨 앞에 배치되는 곡이었습니다만 이 프렐류드를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새로운 피아노 음악 형식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쇼팽입니다. 쇼팽은 바흐의 평균율처럼 피아노의 모든 조성을 가지고 24개의 프렐류드를 만들었습니다. 쇼팽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을 보고 싶다면 프렐류드를 먼저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쇼팽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등 온갖 감정의 스펙트럼이 프렐류드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쇼팽의 프렐류드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곡은 앞서 소개한 28-4번과 더불어 빗방울 전주곡으로 알려진 28-15번일 것 같습니다. <빗방울 전주곡>을 연주하는 쇼팽을 보며 그의 연인인 조르주 상드가 왜 그리 슬프게 들리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기억납니다. 또, 병세가 악화된 쇼팽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인생무상을 느낀 것이 아닐까라는 해석도 본 적이 있습니다.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차분하고도 온화한 멜랑콜리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하지요.
4번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20번 역시 비극적인 멜로디가 반복되는데 라흐마니노프의 '모스크바의 종'이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이 장송곡풍 행진곡이라고 평할 만큼 쇼팽의 곡 중에서도 몹시 비극적인 느낌을 줍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사람답게 좀 더 극적이고 웅장한 절망을 표현했었지만 수줍음 많고 병약했기 때문인지 쇼팽이 그린 절망은 라흐마니노프보다는 개인적이고 더 서정적이지요.
쇼팽의 프렐류드는 훗날 후배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가수인 베리 매닐로우의 노래 중 'Could it be magic'은 쇼팽의 프렐류드 28의 20번을 모티브로 만들었습니다. 도입부는 아예 쇼팽을 그대로 가져왔고 주요 멜로디 역시 쇼팽의 주제를 가져다 썼지요. 가사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하는 호소 같지만 제게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에 대한 간절한 헌사처럼 들립니다. 멜로디 자체가 워낙 비극적이라 가사와 좀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요. 이 노래를 만든 베리 매닐로우는 쇼팽의 프렐류드에서 비극보다는 간절함을 더 강하게 느낀 것 같아요.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도 쇼팽의 프렐류드 28-4번을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지미 페이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전설적인 그룹 레드 제플린의 리더였고 그의 잘생긴 외모와 기타 연주 실력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록 기타로 연주되는 프렐류드를 쇼팽이 듣게 된다면 과연 어떤 감상을 내놓을지 무척 궁금합니다만 저는 록 버전의 쇼팽이 꽤 마음에 듭니다.
제게는 강렬하고도 비극적인 절망으로 보이는 쇼팽과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여러분의 마음에는 어떤 상으로 맺힐지 모르겠습니다. 청각이라는 감각으로 획득한 음악의 풍경인 저만의 심상을 최대한 표현해보고자 노력했는데 이 또한 독자들에게 와닿을지도 궁금하고요. 음악의 아름다움은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포착되는 것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되면 음악은 평생의 친구가 됩니다. 친한 친구와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만큼이나 고적한 한 밤, 나만의 외로움과 비극적 감성을 나누는 데에는 음악만 한 친구는 없으니까요.
P.S. 이번에는 감상할 곡이 좀 많아졌습니다만 곡이 대체로 3분 내외로 짧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연주한 모스크바의 종 https://www.youtube.com/watch?v=ZcG-DnGdWRw
지미 페이지가 연주하는 쇼팽의 프렐류드 28-4번 https://www.youtube.com/watch?v=aOpNoP1oKiM
대문 이미지: 마크 로스코
(글 속의 두서없고 장황한 부분을 수정하였습니다. 댓글을 달아주신 내용이 사라지게 되어 정성스럽게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