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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로 음악을 만든 연금술사

알렉산드르 보로딘, <현악 4중주> 2번

by 김정은

쌀을 재료로 만든 희끄무레한 음료수, '아침햇살'을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이 음료수를 꽤 좋아했답니다. 대학생 때 아침 수업을 들으려면 집에서 늦어도 7시에 나와야 했습니다. 조용한 수업 시간 '꼬르륵' 소리 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학교 매점에서 이 아침햇살을 사서 강의실 들어가기 전 마시곤 했지요. 무엇보다 음료수 이름이 '아침햇살'이라니 작명도 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이 음료수만큼이나 달달하면서도 아침의 햇살처럼 화사한 클래식 곡이 있습니다. 러시아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보로딘의 <현악 4중주> 2번입니다.



보로딘 현악 4중 주단, 보로딘 현악 4중주 No.2 https://www.youtube.com/watch?v=Zm_gpB_be0c

1악장은 찬란한 봄날의 햇살 그 자체입니다


보로딘은 음악에 전적으로 헌신한 프로 음악가는 아니었습니다. 의사이자 화학자, 그리고 대학 교수로 생활하면서 취미로 작곡을 하고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기 때문에 '일요일 작곡가(Sunday Composer)'라는 별명이 있었지요. 보로딘 스스로도 '음악활동이 누군가에게는 직업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휴식과 휴양'이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현악 4중주> 2번과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오페라 <이고르 공> 등은 대중에게 두고두고 사랑받는 클래식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지요. 특히 <현악 4중주> 2번은 햇살과 사랑으로만 빚은 음악 같습니다. 온갖 광물의 재료로 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연금술사처럼 보로딘은 오직 음표와 아이디어만으로 금빛 음악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현악 4중주는 바이올린 2대와 비올라 1대, 그리고 첼로 1대로 구성된 실내악 연주형태로 스트링 콰르텟(String Quartet)이라고도 합니다. 실내악은 16세기부터 나타났지만 현재와 같은 연주 형태와 형식이 확립된 것은 18세기 후반인데요. 하이든을 필두로 모차르트, 베토벤을 거치면서 지금의 형태가 완성되었지요. 현악 4 중주곡은 총 4악장, 즉 4개의 독립된 음악 파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독립되었다고는 하나 각 악장을 소설의 장(Chapter)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처럼 악장이 있는 음악도 기승전결이 있습니다. 음악의 기승전결은 3악장과 4악장, 때로는 5악장으로 이루어진 소나타와 교향곡과 협주곡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보로딘의 <현악 4중주> 2번의 조성은 장조(라장조, D-Major)입니다.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음악 대부분은 단조였는데 화사한 곡을 소개하려니 대번에 장조가 눈에 띄어 조성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음악의 조성은 크게 장조와 단조로 나뉘는데요. 장조냐 단조냐에 따라 음악의 무드(분위기)가 크게 달라집니다. 가장 기본적인 다장조(C-Major, 피아노 음계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다장조임)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음악이 '반짝반짝 작은 별'인데요. 이 반짝반짝 작은 별을 단조로(미 플랫, 미에서 음표를 검은건반으로 연주) 편곡하면 순수한 동요가 대번에 음울한 장례식 곡이 됩니다.


흔히 장조(Major)는 사랑스러움과 기쁨, 희망과 쾌활함의 무드를, 단조(Minor)는 슬픔과 비극, 우울의 무드를 만듭니다. 클래식 음악 중 사랑스럽고도 밝은 곡의 대표주자인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장조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 절망을 표현한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는 단조이지요. 음악이 마법을 부리기 위해서는 조성이라는 마술 지팡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단조와 장조의 조성을 기초로 하여 작곡가들만의 개성과 화성이라는 주문이 더해질 때 완벽한 마법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보로딘의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순서대로 듣기를 추천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좋은 부분을 고르라면 1악장과 3악장을 고르겠습니다. 보로딘의 현악 4중주는 기승전결이 어느 정도 뚜렷하지만 모든 악장이 대체로 긍정적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부분만 따로 듣는 것이 곡 전체를 이해하는데 문제 되지는 않습니다. 주말 아침,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싶을 땐 1악장을, 나른한 오후 한잔의 차를 마시며 책을 읽을 땐 3악장이 제격입니다. 각 악장의 이름은 다음과 같아요.


1악장 Allegro moderato (알레그로 모데라토)

2악장 Scherzo: Allegro (스케르초: 알레그로)

3악장 Notturno: Andante (녹턴: 안단테)

4악장 Finale: Andante - Vivace (피날레: 안단테-비바체)


음악가들이 악장의 제목으로 자주 쓰는 표현은 음악의 형식(스케르초, 녹턴 등)과 음악의 속도(알레그로, 모데라토, 안단테, 비바체 등)를 알려주는 지시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연주가들은 스케르초와 녹턴이라는 음악적 형식과 알레그로나 안단테의 속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작곡가가 어떤 의도로 음악을 만들었는지, 또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작곡가의 지시를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 알레그로: 빠르기

모데라토: 보통 빠르기

알레그로 모데라토: 알레그로보다 조금 느리게

비바체: 아주 빠르게(생기 있게)

안단테: 느리게(걸음걸이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아다지오: 매우 느리게



봄날의 햇살이 커다란 통창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착각이 들만큼 화사한 1악장을 듣노라면 삶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가 절로 솟아납니다. 보로딘은 첼로를 자기 자신으로 바이올린을 아내라고 생각하며 곡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러니 1악장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두 연인의 대화라고 상상하면 음악이 보다 더 와닿으실 거예요.


2악장의 무대는 졸~졸~졸 시냇물이 흐르는 작은 숲 속입니다. 이제 막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 숲은 온통 연둣빛 싱그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숲 속을 함께 걷다가 우연히 만난 시냇물. 맑고 차가운 물속에 발을 담그며 서로에게 장난치는 듯한 사랑스러움이 가득합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기 있는 3악장은 봄꽃이 가득 피어난 스위스의 들판이 떠오릅니다. 바람 하나 없고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 한 점 떠 있습니다. 들판에는 양 떼들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사랑을 속삭이며 서로를 가만 바라보는 한쌍의 연인이 그 옆에 앉아 있지요. 애인의 눈썹에 내려앉은 햇살을 손가락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두 사람은 전원을 닮은 평화롭고도 달콤한 사랑의 무드에 그저 말없이 쳐다볼 뿐입니다.


4악장은 앞선 악장들과 달리 무겁게 시작됩니다만 분위기는 금방 반전됩니다. 날이 저물어 깊은 어두움이 깔린 밤, 봄을 시샘한 꽃샘추위가 찾아들어 바깥에는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지만 집안에 머무는 한쌍의 연인은 개의치 않습니다. 벽난로 앞에 앉은 두 사람에게 먼 곳에서 야생 짐승의 울음소리도 간간이 들려오지만 4악장 피날레는 러시아 식의 해피엔딩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보로딘은 4악장에서 음악가로서 욕심을 내 봤던 것 같습니다. 다른 악장과는 조금 이질적인 화성과 박자의 구성에서 보로딘의 실험적인 도전정신이 엿보입니다. 베토벤과 현대음악이 동시에 들리는 4악장은 다른 악장보다 음악적인 완성도가 높은 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래식 입문자가 4악장을 선뜻 좋아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악장의 진가를 발견하려면 1악장부터 기승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약 30여 분간 음악의 길을 걷다 보면 보로딘이 그린 사랑의 서사가 얼마나 황홀한 결말을 맺는지 알게 되실 거예요.


이 곡은 1881년 결혼 20주년을 기념하며 보로딘이 자신의 아내 에카테리나 프로토 포포바에게 헌정한 작품이에요. 그래서 이 작품을 흔히 '아내를 향한 연애편지'라고도 합니다. 보로딘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멘델레예프(오늘날의 주기율표를 만든 화학자)와 함께 화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유학시절 젊은 피아니스트 에카테리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에카테리나는 열성적인 양성평등 주의자였다고 해요. 보로딘 또한 양성 평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그러한 신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깨어있는 지식인었지요.


천성이 착하고 다정해서 길고양이를 데려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키우기도 했던 보로딘에 대해 친구들 역시 그를 한결같이 따듯한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보로딘과 함께 러시아 5인조 국민악파 중 한 명인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의 자서전에서 보로딘의 아파트에는 늘 가난하고 병든 친척이나 방문객들이 있었고 보로딘이 그들을 돌봤다고 언급하지요. 쇼스타코비치 역시 보로딘의 아파트를 'Madhouse'라며 그곳에는 늘 아프고 심지어 미쳐가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보로딘은 그들을 돌보고 눈치 보느라 피아노 치기를 자제해야 했다고 회상합니다.


그의 작품 전반을 살펴보면 여타의 러시아 작곡가들과 달리 러시아 특유의 비극적 서정보다는 따스하고 온화함이 가득합니다. 그의 관현악곡들은 드넓은 러시아의 대평원을 힘차게 달려가는 듯 경쾌하고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로맨틱함이 묻어나지요. 그가 만든 슬프고 우울한 멜로디들도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작곡가의 성정이 곡에도 묻어나는가 봅니다. 생각해보면 보로딘은 전문 음악가로서 음악을 대하기보다는 화학 연구로 생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참된 휴식으로서 음악을 대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음악 작품에 녹아들어 있었는지도요.




183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보로딘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화학자, 의학자, 교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러시아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난 보로딘은 아버지의 농노였던 포르피리 보로딘의 아들로 입적하였기 때문에 그의 성 역시 보로딘이 됩니다. 그러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에 피아노와 첼로, 플루트 등을 배웠으며 9살에는 폴카를 작곡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를 사로잡은 것은 화학이었습니다.


화학반응 중에 그의 이름을 딴 '보로딘 반응'도 있다고 합니다. 20여 년 전에 화학을 전공한 저로써는 보로딘을 조사하기 전까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만(;;;) 그의 음악 <현악 4중주>를 들을 때마다 마치 연금술사가 햇빛을 가지고 만든 음악이라고 생각한 것이 근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 하. 하.


보로딘은 본업이 화학자였고 젊은 시절부터 병약했던 아내를 간병하면서 작곡을 했기 때문에 다른 작곡가에 비해 작품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4개의 관현악곡과 피아노곡(작은 모음곡, 스케르초, 헬레네 폴카, 젓가락 행진곡 변주곡 등)이 있고 실내악곡으로 2개의 현악 4중주, 1개의 피아노 3중주, 1개의 피아노 5중주, 1개의 피아노 6 중주곡이 있습니다. 몇 개의 가곡도 있고요. 오페라로 '이고르공'이 있는데 <서곡>과 <폴로베츠인의 춤>은 오페라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저 조차도 무척 좋아합니다.


<현악 4중주>와 더불어 보로딘이 만든 꽤 재밌는 작품이 있습니다. 보로딘의 피아노 소품인 <젓가락 행진곡 변주곡>입니다. 네! 피아노 학원 근처에도 안 가본 어린이들도 다 연주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젓가락 행진곡 맞습니다. 젓가락 행진곡은 오늘날에도 재즈 뮤지션들의 단골 연주곡이랍니다. 반복되는 경쾌한 멜로디 때문에 아티스트들로 하여금 변형과 변주에 대한 욕구를 마구 불러일으키는 곡이지요. 우리나라의 1세대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김광민 역시 젓가락 행진곡을 재즈로 편곡해서 음반에 넣은 적이 있습니다.


<젓가락 행진곡>의 원제목은 <Celebrated chop walts>로 16세의 스코틀랜드 소녀 유페미아 알렌이 아서 드 룰리(Arthur De Lulli)라는 가명으로 1887년에 출판한 곡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이 곡이 <커틀릿 폴카>로 불리었다고 해요. 어느 날, 보로딘의 딸 가냐가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는데도 이 커틀릿 폴카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보로딘이 왼손 반주를 넣어주기 시작한 것이 <젓가락 행진곡 변주곡>으로 발전한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보로딘의 <젓가락 행진곡 변주곡>을 들으면 지금 음악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재지(Jazzy)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김광민의 편곡 버전도 보로딘의 편곡 버전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더라고요. 보로딘이 살던 19세기 중후반 러시아 제국에도 재즈의 조상 중 하나인 렉타임이 유행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대 재즈에서 흔히 사용되는 화성을 러시아 국민악파의 작품에서 듣게 되어 무척 반가웠지요. 이 곡 역시 사랑스러움과 경쾌함 덕분에 듣고 나면 마음속에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젓가락 행진곡에 대한 열정은 보로딘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민악파의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요. 이 이야기는 림스키 코르사코프 편에서 자세히 들려드리겠습니다.


보로딘 <젓가락 행진곡 변주곡> https://www.youtube.com/watch?v=z1RbZo__WGw






보로딘의 생애와 젓가락 행진곡에 대한 내용은 위키백과와 아래의 문서 등을 참조하였습니다.

https://readnomore.wordpress.com/2014/08/19/borodin/

https://www.houstonpianocompany.com/blog/fun-piano-facts/itty-bitty-piano-ditties/polka-or-waltz

https://volunteerpianist.wordpress.com/2018/06/02/mystery-girl/



대문 이미지: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이유의 모네의 정원>, 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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