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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프란츠 리스트, <사랑의 꿈>

by 김정은
사랑하는 것은 천국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
(카렌 선드)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수 백번도 넘게 듣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듣고, 보고 싶지 않아서 듣고, 울고 싶어서 듣고, 울고 싶지 않아서 들었습니다.


소녀의 짝사랑이 얼마나 서러운 것인지 소녀가 아닌 사람은 잘 알지 못합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의 열병에 빠지게 되면 그 감정을 잃고 싶지 않기에 더욱 몸부림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것이 좋아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지요. 그래서 짝사랑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부식되기 시작하지요. 산소가 있어 지구 상의 모든 생명과 무생물이 산화되는(낡아지는) 것처럼요.


어린 소녀가 그토록 사무치게 사랑하던 대상은 바로 고등학생 시절의 지구과학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마도 제가 선생님을 그토록 사모하고 좋아한 줄은 모르셨을 겁니다.


당시 제가 입학했던 고등학교(OO여고)는 설립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신생 학교였습니다. 그래서일까 젊은 선생님들이 많았고 특히 총각 처녀 선생님들이 몇분 계셨지요 . 여고에서 총각 선생님의 인기는 가히 아이돌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가장 인기 많았던 총각 선생님은 지구과학 선생님과 문학 선생님이었어요. 이 두 선생님을 사모하는 학생들은 스스로 팬클럽도 결성했는데 이름하여 '지구왕자파'와 '주사파'였습니다.


'지구왕자파'는 지구과학 선생님(=왕자님)을 사랑하는 팬클럽의 이름이고 '주사파'는 문학 선생님의 성을 따서 '주 OO 선생님을 사랑하는 파'를 줄인 말입니다. 당시 사회적인 문제로 주사파가 뜨겁게 대두되던 시절이었지만 여고생들은 그런 이념적 쟁점 따위에는 개념치 않아했어요. 어쩌면 북한 공산당원들이 수령님을 흠모하고 찬양하는 것 못지않게 여고생들도 그러했으니 비슷한 조직이라고 해야 할까요?


두 선생님의 인기가 어땠느냐 하면 선생님이 지나가실 때 교실 창문에서는 어김없이 '여보~~' 혹은 '남~~ 편'이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밸런타인데이는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선생님의 책상이 각종 선물로 가득해서 다른 여자 선생님들이나 나이 드신 남자 선생님들 책상이 민망해 보이는 사태가 초래되기도 했지요. 또 어떤 학생은 지구과학 선생님 댁에 찾아가 선생님의 아버지께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선생님 빨래를 몰래 하고 왔다고 하여 전설로 남은 일도 있습니다. 하여튼 여고생들의 극성은 대단했답니다.


저는 지구과학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겉으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원래도 부끄러움이 많아 누굴 좋아하면 절대 티를 내지 않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제 가장 친한 친구 역시 지구과학 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친구에게 솔직하게 '나도 지구왕자 선생님을 좋아한다'라고 고백할 수도 있었건만 그때는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중대한 문제였답니다. 제 친구는 초등학생 때부터 우정을 쌓아 온 베스트 프렌드로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단 한 번도 표현해 본 적 없는 아주 수줍음 많은 아이였어요. 그런데 그런 그 수줍이가 글쎄 지구왕자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니 감히 '내가 네 경쟁자다'라고 커밍아웃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저로써는 선생님을 좋아하는 방법은 학생으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 학교의 유일한 지구과학 선생님이었기에 운 좋게도 3년 내내 지구왕자를 수업시간에 만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수업 시간에는 절대로 졸지 않았고 공부도 엄청 열심히 했습니다. 한 번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자(야간 자율학습)를 하고 있는데 그날 야자 감독이었던 지구왕자 선생님이 제게 다가오더니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귓속말로 조용히 말씀하시더군요. "작은 나무야, 네가 지구과학 문과 전교 1등 했더라."


헉! 저는 너무 놀라 눈물이 다 날 뻔했습니다. 내 사랑을 증명하고 표현할 길은 공부밖에 없었기에 저는 다른 과목은 제쳐두고 지구과학만 죽어라 팠던 것이었지요. 허허허. 제가 문과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좋아하고 우주를 좋아하게 된 것도, 훗날 과학을 전공하는 과학도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지구 왕자님의 지분이 9할일 것입니다. 지구과학 외에 다른 과목으로는 전교 1등을 한 역사가 없었으니, 실로 사랑의 힘이었던 것이지요.


불행 중 다행으로 지구왕자 선생님은 1학년 때부터 수업 시간에 초롱초롱 눈을 밝히며 수업을 듣는 저를 이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다니던 4인방(앞서 언급한 수줍이 친구를 포함)이 있었는데 모두들 각 반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들인 데다가 두 명은 지구 왕자선생님의 반이기도 해서 우리 넷을 특히나 아껴 주셨지요. 한 번은 소풍날 선생님과 우리 4인방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을 인화해서 선생님께 가져다 드렸더니 선생님이 그 사진을 선생님의 책상 유리 아래에 끼워 놓은 걸 교무실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4인방은 그 사실에 기뻐서 난리도 아니었지요. 선생님의 책상에 학생과 찍은 사진이 놓인 것은 우리 사진이 유일했기에 어찌나 행복하던지요. 선생님을 짝사랑하던 그 숱한 날들이 한 번에 보상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선생님으로서의 애정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라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고 힘들고 고된 수험생 시절의 유일한 기쁨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때때로 집에서 공부하다가 새벽이 되면 지구왕자가 그리워 한숨이 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책장에서 <어린 왕자>를 꺼내 읽었습니다. 같은 왕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어린 왕자>는 사랑받을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리스트의 피아노 곡 '사랑의 꿈'을 꺼내 듣곤 했습니다.


오빠가 사다 놓은 도이치 그라모폰 음반집에서 우연히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라는 제목을 발견하고 참으로 놀랐습니다. 클래식 음악에서 '사랑의 꿈'이라는 제목을 발견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사랑의 꿈', 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단어인가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리라 꿈꿀 때 삶은 또 얼마나 달콤한 꿀과 같던가요. 사랑이라는 눈 밭에서 사랑의 마음은 본래 주먹만 한 크기로 시작되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으로 눈 뭉치를 굴리다 보면 어느새 내 키보다 더 큰 눈사람이 만들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지요. 짝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더 달콤하고 더 강력합니다.


'사랑의 꿈'은 일단 들으면 그 로맨티시즘에 흠뻑 빠지고 맙니다. 이 곡은 원래 리스트가 만든 가곡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O lieb, so lang du lieben kannst'를 리스트 자신이 다시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한 것으로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라는 원곡의 제목처럼 사랑의 아름다움을 긍정적이고도 달콤한 선율로 듣는 이를 한껏 고무시키지요. 아... 그래, 사랑은 참 아름다운 것이도다...라고요.


제 기준에서 이 곡은 너무 빨리 연주해도 안되고 너무 느리게 연주해도 안 됩니다. 오른손의 타건이 강해 지나치게 선명하게 연주되어도 안됩니다. 물이 흐르고 별빛이 내리는 것처럼,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느낌이 나도록 연주해야 제맛입니다. 또 이 곡 특유의 낭만에 지나치게 취해서 연주하면 오히려 과유불급이 되지요. 절정으로 치달을 때는 격정적이면서도 온화한 느낌이 들어야 합니다. 이런 연주를 찾기 위해 참으로 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었고 결국 이런 제 취향을 대변하는 연주자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연주자는 바로 조지아 태생의 프랑스 피아니스트 카티야 부니아티쉬빌리입니다.


1987년 6월생인 카티야 부니아티쉬빌리는 4살 때 피아노를 시작하고 6살 때 데뷔하였습니다. 호로비츠 콩쿠르와 루빈슈타인 콩쿠르 등에서 입상하면서 주목받는 신인이 되었지요. 카티야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지나치게 루바토를 많이 쓰지 않으면서도 낭만적이고 서정적으로 연주합니다. 임윤찬 군처럼 양손의 균형이 참 좋아요. 임윤찬 연주 스타일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카티야의 연주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그녀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역시 무척 좋았습니다.


저는 오른손으로 주요 음을 강하게 치는 스타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손가락들이 같은 힘으로 건반을 누르고 전체적인 프레이징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만드는 연주를 좋아합니다.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은 루바토가 과해 좀 끈적거리게 연주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담백한 연주도 심심하지만 감성이 과하면 느끼하지요. 낭만적이면서 노래하듯 호흡과 리듬이 있는, 겸손한 인간미가 넘치는 연주가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티야를 알게 되어 참으로 기뻤습니다. 카티야가 연주하는 '사랑의 꿈'은 수 십 명의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어본 중 최고입니다.


Khatia Buniatishvili https://www.youtube.com/watch?v=FZ651tNXp0Y





피아니스트 임윤찬 덕분에 프란츠 리스트와 그의 초절기교를 전 국민이 다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초절기교는 사실 감상용으로 듣기에 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초절기교는 원래 피아니스트들의 연습곡(에튀드)입니다. 리스트의 에튀드뿐 아니라 드뷔시와 쇼팽도 에튀드를 남겼는데 서정적인 작품들도 그 안에 더러 있지만 피아노 테크닉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클래식 입문자가 듣기에는 난해하고 과격한 부분도 있지요. 초절기교는 잘못 치면 시끄럽고 자기 과시적인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임윤찬이 대단한 것은 난해한 기술 범벅인 이 곡에서 리스트의 정신을 읽어내고 그것을 대중이 접하기에 쉽도록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초절기교에서 서정과 낭만을 느끼도록 연주하다니 임윤찬은 정말 대단한 피아니스트입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데다 11살 데뷔 무대에서 베토벤이 감동하여 그를 안아줄 만큼 굉장한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가진 리스트는 살아생전 거의 아이돌 수준으로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초만원이었고 리스트의 연주에 반한 여인들은 그에게 꽃 대신 보석을 던졌다는 당시의 뉴욕타임스 기사도 존재하지요. 그래서일까 젊은 시절 리스트는 여성 편력으로 꽤 유명했습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


1881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리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유명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제자인 훔멜에게 처음 사사했으나 레슨비가 너무 비싸 중도에 그만두게 됩니다. 이후 베토벤의 제자인 체르니가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감명받아 무보수로 그를 가르치지요. 리스트는 또한 모차르트의 라이벌로 유명한 살리에르에게서 작곡도 배웠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데다 좋은 스승들을 두루두루 만났으니 그의 기량은 날개 달린 듯 활짝 피어올랐던 것이지요.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어린 나이에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해야 했던 어린 리스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에 정착하게 됩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피아노 레슨과 연주, 작곡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17세의 리스트는 자신의 제자였던 프랑스 귀족의 딸인 카롤랭 드 생크릭과 불같은 첫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생크릭 아버지의 반대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게 되고, 첫사랑에 실패한 충격이 컸던 리스트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가톨릭에 깊이 빠진 리스트는 성직자가 되고 싶어 했으나 어머니와 주변의 만류로 포기하게 됩니다만 말년에 실제로 서품을 받고 수사가 되기도 합니다.


이 시절에는 사랑하는 연인만 만난 것이 아니라 쇼팽과 베를리오즈, 파가니니 등과 교류하며 낭만주의 음악을 접하게 됩니다. 리스트는 쇼팽에게서 은근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쇼팽을 따라 녹턴을 만들기도 했지요. 또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충격을 받은 리스트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독보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어려운 곡들을 작곡하고 공연에서는 피아노를 쓰다듬듯이 연주한다던가, 혹은 장갑을 벗어던지는 등 쇼맨십도 꽤 발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노력 덕분에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이름을 알린 리스트는 1833년부터 프랑스 사교계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교계에서 23살의 리스트는 6살 연상의 아름다운 백작 부인 마리 다구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하여 헤어질 때까지 10년간 함께 하며 3명의 자녀(블랑댕, 코지마, 다니엘)를 낳게 되지요. 이 중 둘째 딸인 코지마는 음악사에서 아주 유명한 여인이 되는데요. 코지마의 이야기는 뒤에 바그너 이야기 때 자세히 들려드리겠습니다.


마리 다구와 함께 살 때도 외도를 했던 리스트는 마리와 헤어진 후 평생 동안 수십 명의 애인을 사귀며 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귀족 여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남이었던 리스트는 1847년, 러시아의 영토였던 키예프에서 공연을 하면서 두 번째 운명의 여인,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사랑의 꿈'입니다.


1847년경의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부인


1847년 리스트는 독일 시인인 프라일리그라트의 시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를 가사로 하여 가곡을 만듭니다. 1849년에는 독일 시인 울란트의 시 <고귀한 사랑>과 <가장 행복한 죽음>에 음악을 붙여 가곡을 작곡하지요. 리스트는 이 세 개의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하여 1850년 <사랑의 꿈, 3개의 녹턴>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합니다. '사랑의 꿈'으로 알려진 녹턴 3번의 원래 제목은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이고 3개의 녹턴 전체의 제목이었던 '사랑의 꿈'이 어느 순간 3번 녹턴의 제목으로 불리게 된 것이지요.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하고 싶은 한

시간이 오리라, 시간이 오리라

그대가 무덤가에 서서 슬퍼할 시간이


그리고 애써라, 그대의 마음이 타오르도록

그리고 사랑을 품도록

그리고 사랑을 간직하도록

그대의 마음을 향해 또 다른 마음이

사랑으로 따듯하게 두근거리는 한


그리고 그대에게 자기 가슴을 열어 놓는 자

오 그를 위해 그대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그리고 그를 항상 기쁘게 하라

그리고 그를 한시도 슬프게 하지 마라


그리고 그대의 혀를 조심하라

곧 못된 말이 뱉어졌구나

오 이런, 그것은 나쁜 뜻이 아니었는데

그 다른 사람은 그러나 떠나가서 슬퍼한다


아름답지만 자기중심적이었던 마리 다구와 달리 신앙심과 배려심, 지성이 넘쳤던 카롤리네를 만나면서 리스트는 오랜 방랑자(연주여행) 생활을 청산하고 그녀와 함께 정착하게 되는데요. 1848년에 바이마르 궁정음악가로 초빙받아 1861년까지 바이마르에서 오래 생활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리스트는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파우스트 교향곡, 단테 교향곡, 전주곡과 마제파(초절기교 에튀드 4번)등 걸작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요.


카롤리네는 리스트와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 교구청에 남편과의 혼인무효를 허락받고자 무던히 노력하였지만 그녀가 가진 방대한 땅을 욕심 낸 러시아 정부의 방해로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녀는 리스트와의 결혼을 위해 땅을 포기하였고 그 땅은 러시아 정부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던 러시아 정부의 모략으로 자신의 딸과 소송을 벌여야 했던 카롤리네는 결국 리스트와의 결혼을 포기하게 됩니다.


카롤리네와 리스트는 이별하게 되었지만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연락하며 인연을 이어나갔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카롤리네는 조용한 곳에서 남은 평생 글 쓰기에 바쳤고, 리스트는 젊은 시절 원했던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지요. 비록 중도에 서품 받기를 멈추었지만 수사의 신분으로 다수의 종교 음악을 작곡하였습니다. 1886년 7월, 급성 폐렴으로 인해 75세의 나이로 리스트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리스트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은 카롤리네는 8개월 후에 그의 뒤를 따라가게 됩니다.


말년의 리스트


비록 두 사람이 말년에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카롤리네를 처음 만난 해에 작곡된 가곡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와 녹턴 '사랑의 꿈'은 음악으로 지금까지 연주되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불멸로 남은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사랑으로 충만해 본 적이 있다면 사랑의 기간에 상관없이 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런지요. 사람들의 우울과 슬픔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 염미정이 말했던 것처럼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었'던 데에서 기인하는 듯 해요. 그 사랑이 에로스적이든 아가페적이든 간에 어떤 형태의 사랑으로든 그 사랑만으로 충만한 적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기억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들에게 나는 과연 충만한 기분이 들도록 마음껏 사랑을 주고 있는지 되돌아봐얄 것 같습니다.


참, 지구과학 선생님은 제가 졸업하고 3년쯤 후에 우리 학교 이전에 재직하신 고등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와 결혼하셨답니다. 그 소식에 지구 왕자파였던 친구들이 어찌나 아쉬워했던지요. 저도 실은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잠을 못 이뤘어요. 졸업 후에라도 찾아가서 용감하게 고백이라도 해볼걸! 그래서 리스트가 그토록 힘주어 이야기했던 걸까요.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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