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지 생활 시작 한달째가 되니 제법 적응이 되는 모양이다. 그동안은 몇 시간씩 영어를 듣고 집에 오면 기진맥진해서 하루종일 아무일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수업만 들었을 뿐인데, 혹사 당한 거라고는 어깨 위에 붙어 있는 두개골 속 전두엽 정도일텐데 팔과 다리, 심지어 눈꺼풀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가족들을 굶길 수는 없기에 초인적인 힘으로 저녁 밥상 만은 간신히 사수하였다. 그래서일까. 힘은 무척 들었지만 오히려 살은 쑥쑥 잘도 쪘다.
그러나 놀랍게도! 5주차 수업에 다녀온 후 영어에 대한 피로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칼리지 입학 전 칼리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이 한국 학생들만 모아 오리엔테이션을 했는데 그 때 그 직원이 그랬다. 첫 한달은 적응하느라 여러모로 힘들겠지만 한달만 버티면 적응 된다고 말이다. 괜한 말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임을 몸소 깨달았다. 물론 속사포 랩 영어는 여전히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영어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역시...시간은 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 시간 중 교수님들이 농담을 하면(특히 백인 남자 교수들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퀼이나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에 빙의된 양 농담을 자주 하는 편이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꺄르르 웃어대는데 나와 한국인 친구만 알아듣지 못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만 봤다. 우리 두 사람은 영어는 늘지 않는데 대신 서로 '무슨 뜻이야? 왜 웃을까?" 라며 눈으로 말하는 능력을 얻었다. 왜 이런 노래 가사가 있지 않았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나마 매주 제출하는 과제 점수가 예상보다 높다는 데에 위안을 삼았다.
강의 시간에 교수들이 말 한 내용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과제를 내 줄 때 과제에 대한 Introduction(지시사항)문서가 있기 때문에 이것만 잘 읽고 이해하면 과제를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또 과제를 하다 궁금하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한국인 동기와 의논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되면 따로 교수님에게 묻거나 메일을 보내서 궁금증은 반드시 해소를 했다. 해외 나와서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만나보니 보이더라. 한국인처럼 꼼꼼하고 세심하고 성실한 민족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1학기가 한참 지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외국인 친구들이 영어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냥 스피킹만 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젊은 친구들 - 그러니까 주로 인도, 아랍, 대만, 남미 출신 동기들이 나와 한국인 동기에게 와서 툭하면 숙제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질문을 들어보면 수업시간에 교수들이 재차 강조한 사항인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좀 의아했다. Introduction 문서만 꼼꼼하게 읽어도 해결될 수준의 질문을 자꾸 해대는 통에 귀찮을 때도 많았다. 너무 물어보니 나중에는 내가 본인들 비서라도 되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수업 시간에 교수들이 지난 과제에 대해 피드백을 종종 하는데 숙제의 지시사항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제출하는 학생들이 많아 교수들이 제발 좀 introduction을 꼼꼼하게 읽고 제출하라고 사정을 했다. 숙제를 제출 할 때 파일명 규칙이라던가, pdf 파일로만 제출하는 등 기본사항은 물론이고 심지어 간단한 숙제조차 내지 못하는 학생들도 꽤 되었다.
칼리지 들어오기 직전 공부한 어학원 시절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영어로 스피킹은 청산유수인 아프리카 친구랑 같이 과제를 하는데 자기 분량의 리포트를 써 내질 못해서 결국 내가 다 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브라질에서 변호사를 하는 친구와도 과제를 하는데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아 결국 또 내가 해야만 했다. 그룹과제에서 무책임한 외국인 학생들의 이런 숟가락 얹기는 비단 나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한국 유학생들 공통경험이다. 특히 인도인에 대해서는 대부분 학을 뗐다.
한국인 학생들은 영어를 능숙하게 말을 못하는 대신 숙제를 꼼꼼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수능 세대라 그런지 읽기와 쓰기에 강해서 리포트도 잘 써서 낸다. 그래서 과제 점수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반면에 영어를 잘하는 아랍인, 인도인, 중남미인 중에 숙제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친구들은 말은 잘하지만 읽기와 쓰기에 약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친구들은 새벽에 문자를 보내 숙제를 물어보고 도와 달라고 해서 난감한 때가 종종 있었다. 그것 뿐인가. 한가지 기능을 익히기 위해 새벽까지 유튜브를 보며 몇 시간씩 공부를 해야 했는데 교실에서 꼭 이런 기능만 물어보고 액기스만 쏙쏙 뽑아가는 얄미운 외국인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캐나다에 머물면 머물 수록 느끼는 것이 있다. 이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어떤 능력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한국인들은 완성도 높게 과제를 수행하지만 대신 혼자서 어떻게든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에 인도인이나 중동인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무슨 일이든 쉽게 쉽게 해결하려 한다. 혼자서 끙끙대며 해결하기 보다는 반 친구에게 또 교수에게 수시로 물어보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영어로 말을 잘 못하니 물어보고 싶어도 못 물어볼 때가 많다. 그래서 그냥 집에 와서 마음 편하게 검색으로 혼자 해결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영어 말하기가 잘 되는 다른 나라 친구들은 몇 시간씩 검색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친구들이나 교수에게 물어 쉽게 해결한다. 비록 좀 약은 모습이긴 하지만 누가 옳고 그르다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그저 문제해결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인도인들이 특히 이런 커뮤니케이션에 강하다. 이들은 성격 자체도 사교적이고 영어도 잘하기 때문에 실제 능력에 비해 어딜 가서든 그 곳에 쉽게 잘 융화되는 것 같다. 심지어 과제할 때 보면 항상 큰소리를 치고 잘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한다. 결론은 결국 내가 덤터기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그에 반해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덜 사교적이다보니 능력에 비해 인정을 덜 받는단다. 실제로 캐나다에서 가장 연봉이 높은 민족이 어딘가 조사를 했더니 1위가 인도인이었다. 한국인은 아마도 10위 였던 걸로 기억 난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물어보면서 해결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요즘은 반 친구나 교수님에게 물어보려 많이 노력하는 중이다. 그리고 새벽이나 주말 아랑곳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연락해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반 친구들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내 정신건강도 무~~척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