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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Mar 27. 2020

코로나가 내게 남긴 것.

숫자 이면에 내포된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피폐하게 얼룩져 있을까.


‘고작 전구 하나를 갈아 끼우는 것뿐인데...’

어두컴컴해진 방안에 작은 의자를 딛고 올라가 천장을 향해 위태롭게 팔을 뻗고 있는 전신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말 그대로 고작 전구 하나를 갈아 끼우는 것뿐인데. 여전히 나는 삼십 분째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하얀색 백열등을 돌리고 또 돌리고 있었다.




‘도대체 왜 안 되는 건데!’

나선형으로 된 끝부분을 전등 캡에 알맞게 돌려 넣으면 그만인데, 이토록 단순한 작업이 왜 이렇게 나를 지난하게 만드는 걸까. 가슴속에서부터 터져 나온 울분이 결국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나온다. 주먹보다도 작은 하얀 백열등을 손에 꼭 쥔 채 그렇게 나는 쭈그려 앉아 한참을 흐느끼고 말았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니, 나는 강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운명이라는 씨줄과 날줄 아래, 아들 넷, 그것도 세쌍둥이 엄마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삶은 나를 번번이 인생이라는 시험대에 올려놓고는 했다. 세쌍둥이 임신을 알았던 날, 선택 유산이라는 기로에 놓여 세쌍둥이를 품어야 할지 고민했던 날도 그러했고, 세쌍둥이 만삭의 주수까지 혼신을 다해 버텨 아이들을 출산한 날도 그러했다. 생후 백일 무렵부터 시작한 아들 넷 독박 육아는 가혹했고, 멀쩡했던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파산하고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던 그 시간들도 내게는 차갑고 쓸쓸한 바다였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다. 아들 넷 엄마라는 운명도 한 사람으로서의 존재의 가치도, 그 미약하고 가느다란 줄을 놓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아이들을 재운 밤, 터질 것처럼 폭발해버릴 것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글쓰기를 통해 토해낸 것은 어쩌면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싶었던 안쓰러운 몸부림이었으리라. 그렇게 나는 일어났고 또다시 달렸다.



     

아들 넷을 데리고 뉴질랜드 기러기가 되겠다고 선택한 것도 그러한 몸부림의 연장이었다. 이 결정은 비단 아이들을 위한 어미로서의 헌신이 아니었다. 물론, 아래층과의 층간소음 분쟁이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한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해보고 만들어보고 싶은 삶의 호기심과 충동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더 늦어지면, 다시 말해 더 나이를 먹게 되면,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서른일곱 지금의 내가 느끼는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큰 공포와 주저함이 나를 가로막을 것 같았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국 나는 떠났고 벌써 2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번의 차 사고를 겪은 후 나의 삶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장롱면허 탈출이라는 내 인생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것을 깨트리게 되자 한때는 자신감이 차오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홀로 차를 몰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의 나는 능숙하게 아이들을 카시트에 앉힌 뒤 바다로, 산으로 떠나고는 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외출을 할 때마다 내가 아이들을 챙기면 남편은 늘 자리를 정리하고는 했는데, 홀로 남편의 몫까지 할 때마다 남편의 손길이 눈물 나게 그리워지곤 했다.    


  

이곳 뉴질랜드는 무엇 하나 편리한 게 없다. 새벽마다 일어나 큰애의 도시락과 모닝티 간식을 싸야 하고, 스쿨버스가 없기에 아이들을 아침과 오후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야 한다. 마당의 잔디를 깎고 잡초를 제거하는 것도, 가스통을 주기적으로 교체하고 설치하는 것도 오롯이 내 몫이다. 또한, 인터넷으로 장을 보는 것이 발달되어 있지 않기에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는 분주하게 먹을거리와 물건들을 사다 날라야만 한다. 웨어하우스, 스테이셔너리, 아시안 마켓, 데어리 등 물품마다 파는 곳이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쇼핑을 할 때마다 여러 곳을 들르곤 한다.




집안 곳곳의 전구가 나가자, 버닝스(건축자재매장)라는 곳에서 전구를 사와 전구를 갈아 끼웠다. 저주받은 곰손이기에 성공률은 절반에 미쳤다. 두 곳은 몇 번을 반복해도 이상하게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전구 하나 갈아 끼우는 것뿐인데, 이 단순한 행위가 내게는 너무나도 혹독한 시험 같았다. 전신에 땀이 흐르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조막만한 키로 천장에 손을 뻗고 또 뻗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시에 남편이 생각났다. 이 별거 아닌 이 행위가 그동안 꾹꾹 눌러 담고 참아왔던 감정들을 뒤섞어버렸다.      



‘뉴질랜드 국경 폐쇄 결정’

코로나 사태가 발발된 이후로 우리 가족은 쉽지 않은 상황을 맞이했다. 먼저 항공사를 다니는 남편의 회사 상황이 심각해졌고 이번 달 말까지 비행 스케줄이 잡히지 않아 집에 있어야만 했다. 그나마 가까스로 월급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는 우리나라 최대 항공사임에 불구하고, 일반직원, 승무원, 외국인 파일럿에 대해서는 무급휴직을 실시하고 있다.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남편 역시도 언제 무급휴직 대상이 되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나 4년 전 처참하게 파산한 나의 회사처럼 남편의 회사 역시 권고사직을 실시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도산할 수도 있다.

뉴질랜드 국경 폐쇄 결정이 나기 전, 이미 하늘 길은 막혀 버렸다. 직항 노선은 임시 폐지되었고 1~2회 경유하여 30시간이 넘는 시간을 버텨 들어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달 초 중국으로 마지막 비행을 다녀온 남편은 아예 출국 대상이 될 수 없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경유지 국가들도 속속히 한국인 입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뉴질랜드 국경이 폐쇄된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언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   



  

아직 코로나 확진자가 300명이 조금 안 되는 뉴질랜드이지만 최근 며칠간 급격한 확진자 증가세를 보이자,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국가 비상사태를 실시하고 어젯밤 자정부터 한 달간 ‘전 국민 자가 격리’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한 달간 대형 슈퍼마켓, 병원, 일부 약국을 비롯한 필수 기관을 제외하고는 학교, 유치원, 회사 등 대부분의 기관들을 문을 닫아야 한다. 불가피한 일을 제외하고는 외출이 금지된 상황이다. 교민들 사이에서는 이곳의 의료시스템이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게 되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전체적 고립’을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코로나 진단 능력/역량이 부족하기에 300명이라는 확진자 케이스를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도 지배적이다. 이곳에서는 마스크도 구하기 어렵다. 더욱이 병원도 가기 힘들다.



   

앞으로 한 달간 아이들과 집에서 잘 견뎌낼 수 있을까. 며칠 전 마트에서 보았던 사재기 행렬이 아직도 기억에서 흩어지지 않는다.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조장하고, 두려움을 야기한다. 뉴질랜드행은 괜찮은 선택이었던 걸까.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한 달 넘게 지속되면 어떡해야 할까. 한국에 남았다면 지금쯤 아래층과 더욱 깊어진 갈등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그것보다는 지금 작은 앞마당을 품고 있는 이 아담한 이층 집이 과분한 행복이 아닐까. 콕콕콕. 편두통이 시작된다. 해맑게 웃고 있는 천진무구한 아이들을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이상한 죄책감이 가슴 한편을 짓누른다.     




며칠 전, 우연히 전 세계의 코로나 확진 숫자를 보게 되었다. 182개국에서 현재까지 발생된 코로나 확진 숫자는 45만 876명에 이르고, 사망자만 2만 647명이 되었다. 인류는 전쟁과 평화를 거듭하며 진화해왔다.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물론 다른 양상이지만 제3차 대전에 준하는 파급력과 희생을 낳고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확진 숫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괜한 두려움과 동시에 묵직한 숙연함이 일렁인다. 이것들은 단지 숫자가 아니다. 이 숫자들 이면에 내포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피폐하게 얼룩져 있을까. 그 고통들은 지금 내가 겪는 고통보다 얼마나 더 처참하고 처연한 것일까.

내가 누려왔던 일상들은 감사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다행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시기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힘을 내어보고 싶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고 한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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