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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Jun 14. 2021

노안을 맞이하며

갑자기, 가까운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정말로 갑자기였다.

텍스트를 눈 앞에 가까이 가져오니 글자들이 오들오들 떠는 듯, 흐리멍덩해져 보였다.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보다가 자세를 바꾸는 사이에 불현듯 눈 상태가 전과 다름을 알게 되었다. 평상시 그렇게 가까이서 글자 볼 일이 별로 없으니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 원래 시력과 나이를 감안하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학창 시절까지 내 시력은 2.0이었다. 아주 잘 보였다. 실시간 버스도착 안내판이 없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저 멀리서 슬금슬금 오고 있는 버스 번호를 먼저 알아보고 "77번 버스 온다!"라고 친구들에게 알리면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일과 출산과 나이 듦으로 인해 지금은 0.8에서 1.0 정도로 떨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좋은 편인데, 글자들이 가까이서 부르르 떨기 시작했으니 이제 서서히 약해져 가겠지.


노안은 나이 순에 따라 남편에게 먼저 찾아왔었다. 멀리서 봐야 잘 보인다며 진짜 나이 든 것 같다고 서글픈 듯 말하던 남편에게, 자연적인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던 나였다. 얼마 전에도 업무상 깨알 같은 글자들을 확인해야 할 때 힘들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슬프게 들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내 눈 앞이 흐릿해지니 기분이 매우 묘했다. 책을 눈 앞에 들이댔다 뗄 때마다 글자가 흐렸다 다시 거짓말처럼 선명해지는 게 낯설었다. 말로만 듣던 노안이 나에게도 왔구나. 작년부터 텍스트를 많이 본 까닭일까.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남편의 노안은 대수롭지 않았는데 나의 노안은 대수롭게 느껴졌다. 나이 들고 있다는 걸 몸소 확인하게 되니 조금 슬퍼졌다. 겪어봐야 아는 것이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6월 18일,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15년 되는 날이다.

둘 다 미리 휴가를 내었고, 아이들 학교 보낸 후 하루 동안 데이트를 할 계획이다. 이제 나까지 노안이 의심되어서 15주년 기념일 첫 일정으로 함께 안과에 가보기로 했다. 


같이 늙어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누가 보면 할머니 다 된 줄 알겠다.) 

우리 손 잡고 같이 가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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