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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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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썹달 May 01. 2022

깨작깨작 배터리 채우듯

오랜만에 택시를 탔다. 강남에 있는 결혼식장을 가는데 버스나 지하철로는 시간을 맞출 수 없게 되어서 부랴부랴 택시를 호출했다. 


운전석도 보조석도 아닌 뒷좌석에 혼자 타서 창밖을 봤다. 나도 모르게 시트에 머리가 기대어졌다. 감사하게도 기사분은 말씀이 없으셨고 라디오도 나에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볼륨으로 들으셨다. 나는 앞차가 가는지 서는지, 옆 차선에 차가 있는지 없는지,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나에게 어떤 의무도 주어지지 않고 음악도 대화도 없는 조용한 차 안. 잠시 일상이 진공 모드가 된 듯 고요한 기분이 되었고 뒤이어 편안함이 밀려들었다.


몸에 힘을 빼고 기댄 채 창밖을 가만히 응시해본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초록이다. 자연이 어김없이 제 할 일을 하는 덕에 이렇게 싱그러운 계절을 느낀다. 비 온 뒤 아직 구름 낀 하늘이지만 쨍하지 않음도 이 순간과 어울린다. 창문을 살짝 열어 시원하고 깔끔한 바람도 느껴본다. 모든 것이 청량하구나. 참 좋다.


너무도 바쁘고 생각할게 많은 요즘. 지난 2주간 회사에서의 나는 마치 어딘가에 붙잡혀 핸들을 놓을 수 없는 운전자가 된 것 같았다. 여러 일들에서 다 속도를 내야만 했고 주차는커녕 일시 정지할 틈도 찾지 못할 만큼 바빴다. 야근까지 하는 바람에 나를 위한 시간은 고사하고 집에서 아이들과 얘기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고 맞이한 주말이었다. 달리는 택시에 기대어 풍경을 보는 시간 동안 바빴던 일과들이 머리를 스쳤다. 이렇게 아무 방해 없이 홀로 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에 마음이 짠했다. 무미건조하게 멍 때리며 보내버렸을지 모를 시간이 이토록 크게 다가오다니... '아, 나에게 이런 순간이 절실했구나.' 이 작은 평화는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일수록 더 많이, 나에게 찾아온 좋은 순간을 알아챌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찰나일지라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즐길 줄 알아야겠다. 소확행이 왜 중요한지, 그 의미를 새삼 깨달았다. 잘 붙잡아 마음에 새긴 순간들은 그 시간보다 더 길게 나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나를 충전하기 위해 긴 시간을 쓸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그건 쉽지 않으니 틈틈이, 짬짬이, 깨작깨작, 아기자기하고 귀엽게 나를 충전해주는 순간 모으기를 해보기로 한다. 충전기를 꽂았다 뺐다 반복하면서 깨작깨작 배터리를 채우듯이 말이다. 짧다고 무시하지 말아야지. 그 짧은 충전이 나의 전원 OFF를 막아줄 테니까.


코로나로 멈췄던 일들이 재개되고 있어서 바쁜 날들이 계속될 것이다. 일과 휴식의 밸런스를 잘 맞춰가야 버텨낼 수 있다.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고 나를 다독이는 시간으로 만들어 슬기롭게 헤쳐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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