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책이란?
앞선 글에서 본문에 담긴 글과 그림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림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서사의 핵심을 전하고 있는 것이 본문이지만, 본문만이 그림책의 전부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림책에는 제목이 있고, 제목이 적힌 표지가 있고, 한 장 넘기면 나오는 면지가 있습니다. 그 외 판형, 타이포그래피, 가름끈, 띠지 등등 그림책이라는 물리적 매체를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합니다. 이렇듯 본문 이외에 그림책을 이루는 구성 요소를 주변텍스트 혹은 곁텍스트라고 합니다. 단순히 그림책을 둘러싸고 넘기고 명명하는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책 서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장으로 활용됩니다.
좋은 그림책은 잘 지은 집 한 채와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집을 보러 갈 때 집 안으로 쏙 들어가서 거실과 방만 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지요. 문을 열었을 때 현관의 느낌이 어떠한지,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어떠한지, 볕과 바람이 잘 통하는지, 구조가 우리 가족의 생활에 적합한지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합니다. 그림책도 마찬가지예요. 본문 뿐 아니라 표지, 면지, 타이포그래피, 판형 등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그림책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본문만 보는 건, 집을 반만 보고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거지요.
1. 표지
그림책을 만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표지입니다. 표지와 제목으로 첫인상이 결정되지요. 말하자면 표지는 그림책을 처음 만나는 입구이자 그 책의 얼굴입니다. 표지에는 제목이 쓰여 있고, 본문의 중요한 한 장면을 따오거나 혹은 전체 서사를 관통할 수 있도록 작가가 새로이 작업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번역서의 경우 국가마다 표지가 달라지기도 하고, 절판되었던 책을 복간하면서 표지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독자들의 정서, 문화적 차이 등이 반영된 결과겠지요.
웬디 케셀만 / 바버러 쿠니의 <엠마>입니다. 원서는 초록색 액자 안에 엠마 할머니가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을 표지로 채택했습니다. 반면 번역서는 분홍색 액자 안에 할머니가 처음 식구들에게 그간 그려왔던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장면을 표지로 선정했습니다. 전자에서는 할머니의 충만감이, 후자에서는 할머니의 설레임과 용기가 더 부각되어 드러납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왼쪽은 2001년 나왔던 초판이고, 오른쪽은 2016년 복간본이에요. 표지 그림이 달라져 있지요? 2001년 버전에서 표지 그림으로 채택했던 장면은, 찰스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두 아이의 모습입니다. 본문에서는 작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이 장면을 표지로 선정하여 크게 보여주고 있지요. 2016년 버전에서 채택된 그림은 스머지의 시선으로 바라본 찰스와 찰스 엄마입니다. 역시 본문에서는 작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요. 전자는 이 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큰 힌트를 주지 않아요. 공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증이 생기면서, 소실점에 서 있는 아이 둘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지요. 후자는 찰스와 눈이 마주치는 듯한 효과를 일으키면서, 이 아이와 어떤 관계가 일어나겠구나 짐작하게 됩니다. 잘 차려 입고 무관심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는 엄마 캐릭터의 성격도 드러나지요. 전자에 비해 이 책에 등장하는 캐릭터, 이야기의 진행이 조금은 더 드러나 있는 셈입니다.
위의 두 예시에서는 책에 나온 장면을 표지로 활용하였지만, 표지 작업을 새로이 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이수지 작가의 <거울 속으로>를 보면, 한 소녀가 거울을 등대고 서있는 듯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목 "거울 속으로" 역시 거울에 비친 듯 거꾸로 된 상을 함께 표현하고 있어요. 거울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겠구나, 그게 완전히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현실과 거울의 상을 동시에 보여주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책을 다 읽은 후 뒷표지에 이르면 조금 섬뜩해집니다. 소녀가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거울 속에 반대의 상이 아니라 동일한 상이 그려져 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현실과 거울의 동일성? 어떻게 해도 소통할 수 없는 관계의 답답함? 내가 바라보는 나의 뒷모습? 보통 본문이 끝나고 뒷표지에 이르면 후련해지게 마련인데, 독자를 오히려 궁금하게 만드는 뒷표지입니다.
표지에는 출판사가 담고 싶은 정보도 담습니다. 보통은 마케팅을 위해 수상 정보를 많이 넣지요. "케이트 그린어웨이 수상작" "칼데콧 수상 작가의 최신작" 등의 은색 딱지가 붙곤 합니다. 마케팅 효과는 좋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온전한 표지를 보고 싶어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요 ^^ 표지에는 또한 작가와 옮긴이의 이름, 그리고 출판사 로고가 들어갑니다. 대부분은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로고를 넣게 되는데요. 표지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거나 중요한 그림 부분을 가려 표지의 완성도를 해치는 경우도 가끔 발생해요. 그런데 표지 그림과 잘 어울리도록 센스있게 출판사 로고를 넣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림책공작소라는 작은 출판사의 예시를 보여드릴게요.
<여기보다 어딘가>의 로고는 언덕 너머 작은 집처럼 그려져 있지요. 정말 언덕 위 빨간 집이 지어진 것처럼 감쪽 같아서, 출판사 로고인지 모를 지경이에요. <춤을 출 거예요>에서는 표지 그림 발레리나의 하얀색과 맞추어 로고도 하얀색으로 변경이 되었지요. <알록달록 색칠괴물>의 로고는 건물 안에 들어가 있어요. 원래 있던 건물 간판 같지 않나요? 이렇게 출판사 로고마저 디자인적 요소로 수용할 수 있는 센스에 감탄하게 됩니다.
2. 판형
앞서 보여드렸던 이수지 작가의 <거울 속으로>는 글 없는 그림책 3부작 중 하나인데요. <파도야 놀자>, <그림자 놀이> 모두 그림책 서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판형을 활용하고 있어요. 책의 접지선이 경계가 되는 거지요. 예를 들어 <거울 속으로>는 좁고 세로로 긴 판형이며, 이 때 접지선은 현실과 전신 거울의 경계가 됩니다. 가로로 긴 판형의 <파도야 놀자>에서 접지선은 땅과 바다의 경계가 되어, 소녀와 파도가 그 사이를 넘나들며 노는 장면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위아래로 펼쳐지는 가로 판형의 『그림자 놀이』는 접지선이 현실과 그림자의 경계 역할을 합니다.
이수지 작가의 한 인터뷰를 보면, 앞의 두 작품은 계획한 것이 아니지만 <그림자 놀이>의 경우 아예 종이부터 상하로 접어놓고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해요. (씨네 21 "형식을 딛고 상상을 열다: 그림책 작가 이수지", 2016. 5월 인터뷰) 책의 물리적 속성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오직 그림만으로도 충만하고 재치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죠. 글줄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의 시각적 속성이 오히려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어요. 아직 위아래로 펼쳐지는 세로 판형은 시도하지 않았는데, 과연 4부작이 완성될 수 있을까요?
다나카와 슌타로와 와다 마코토의 <구덩이> 역시 판형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덩이는 아래에서 밑으로 파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 책은 가로로 긴 판형에, 아래에서 위로 책장을 넘기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아래로 아래로 계속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살리기에 그만이지요.
아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100층짜리 집> 시리즈 역시 판형을 통해 위로 올라가는 혹은 아래로 파고 내려가는 서사를 즉각적으로 드러냅니다. 주인공과 함께 책 속 세계를 오르내리는 듯한 경험을 하도록 도와주지요. (사실 읽어주다 너무 힘들어 제발 시리즈가 그만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ㅎㅎㅎ)
3. 제목
제목은 주인공의 이름, 주요 소재, 사건이 일어나는 주요 장소, 반복되는 대사 등 그림책을 관통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 짓습니다. 주요 서사나 주인공의 감정을 짧게 설명해주기도 하지요. 패러디 책의 경우, 원작의 제목을 비틀어 짓기도 합니다.
반대로 제목만 봐서는 그림책의 내용을 유추할 수 없고 오히려 궁금증을 유발시키도록 제목을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볼프 에를르부흐의 <내가 함께 있을게>의 원제 <Ente, Tod und Tuple>는 번역하자면 <오리, 죽음 그리고 튤립>이에요. 죽음이라는 명사를 직접적으로 제목에 쓴 번역서는 "나는 죽음이에요" 빼고 거의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번역서에서는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빼고 대신 <내가 함께 있을게>라는 문장으로, 어떤 내용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지요.
원서와 번역서 제목의 뉘앙스 차이에 대해 글을 쓴 적이 한번 있는데, 여기에서 간단하게 언급해보려고 합니다.
1) 이름이면 충분하지 vs 이름 갖고 뭘 알 수 있다고?
서구권과 문화적 차이 때문인지, 외서 그림책에는 주인공의 이름만 덜렁 제목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누구다!"라고 선언하면 그것만으로도 존재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글 정보로는 표지에서 이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인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표지의 그림 정보를 보고 미루어 짐작하는 거죠.
반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는 이름만으로 제목을 짓는 경우는 드뭅니다. (늘 예외는 있지요) 대부분 "~한 누구누구"라고 주인공의 특징을 앞에 설명해주거나 "누구누구, 어떠하다" 혹은 "누구누구 무엇하다"라고 뒤에 서술을 해줍니다. 훨씬 친절하지요. 주인공의 속성이나 행동을 설명해줘서, 독자가 받아들이기 쉽도록 미리 기반을 깔아두니까요.
2)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줘!
1번과 맥락은 비슷한데요, 1번은 원제에 부연을 했다면, 아래 보여드릴 책들은 원제와 제목이 전혀 달라진 책들입니다. 책에서 보여질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요.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제 <Le Double>은 '누군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의미해요. 국내에 나온 번역서 제목은 <누가 진짜 나일까?>인데요. 역서의 제목이 훨씬 더 직설적으로 책의 내용을 이야기해주고 있죠.
원제는 <사자의 방>이라는 뜻이에요. 중립적이죠. <곧 이 방으로 사자가 들어올 거야>라는 제목은,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독자가 쉽게 감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맛있는 디저트라는 제목 대신, <산딸기 크림봉봉>이라는 디저트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어요. fruit fool이라는 생소한 디저트 이름 대신, 산딸기 크림봉봉이라고 새롭게 말을 만들어낸 번역가의 역량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데 제목이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해요.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쓴 <The Call of the Swamp: 늪의 부름>은 <나도 가족일까?>로 제목이 바뀝니다. 책 내용 중 가족이라는 키워드를 앞으로 빼내 제목을 완전히 바꿨죠.
역시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쓴 <Piano Piano>는 <피아노 치기는 지겨워>로 변하면서, 아이의 감정이 제목에서부터 직설적으로 드러납니다.
<새들의 나무> 역시 <비밀친구가 생겼어>로 변신. 원제는 글을 이끌어나가는 중심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고, 뉘앙스가 훨씬 중립적이죠.
이 책의 제목은 완벽하게 변신. Liszts, List의 말장난의 묘미가 사라져서 좀 아쉽죠. 부연 설명이 많아서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쉽게 짐작 가능하고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겠으나, 번역서 제목을 훑어보면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 이름만 제목에 써주는 것은 불친절하다고 생각한다.
2. 인물의 성격이나 앞으로 할 행동을 제목에서 미리 보여주는 경향이 강하다.
3. 추상 명사는 잘 쓰지 않는다.
4. 중심 소재보다도, 그것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 혹은 감정을 문장화하여 보여준다.
대체적으로 번역서의 제목이 좀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그것을 존중해주는 서구권에서는 제목에서 굳이 많은 정보를 주지 않고 독자가 상상하게끔 하는 것을 즐기는 듯 하고요. 국내 번역서의 제목들은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는 것 같습니다. 독자가 무슨 이야기인지 보자마자 알아차리게끔 도와주는 거죠.
번역서의 제목이 원제와 꼭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각 나라마다 문화는 다르고, 그 나라 사람들이 가장 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제목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거니까요. 다만 이렇게 제목이 친절하고 길어진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만큼 늘 설명을 구하고 정답을 구하는 데 급급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책 제목에서 전체 내용이 읽히지 않으면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답니다.
요소가 많다보니 주변텍스트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림책에 본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양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커졌네요. 다음 글에서도 면지, 타이포그래피 등 주변텍스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