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책이란?
지난 글에는 그림책의 주변텍스트 중 표지, 판형, 제목에 대한 내용을 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주변텍스트 중 지난 글에서 다 다루지 못했던 면지와 타이포그래피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1. 면지
처음 그림책을 만날 때, 면지는 크게 눈길을 끌던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표지를 넘기고는 바로 본문으로 직행하곤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이전 책들 중에는 면지에 별다른 내용을 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최근 작가들은 면지라는 공간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합니다. 이야기의 주요 소재, 분위기, 주조색 등을 면지에 담아, 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하게 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작가들이 앞면지와 뒷면지에 다른 내용을 담기도 합니다. 그림책의 입출구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지요. 주인공의 감정 변화이든 시간의 변화이든, 서로 다른 앞뒤 면지만 봐도 이야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분위기의 반영] 표지 설명할 때도 등장했던 이수지 작가의 <거울 속으로>입니다. 노오란 면지에 검은 색 물감이 튀긴 듯한 이미지가 계속 반복되고 있지요. 문양을 잘 보면 좌우 대칭인 데칼코마니입니다. 직접적으로 본문의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현실/거울의 이미지 반복, 노란색/검은색의 주조색이 빚어내는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면지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요 소재의 반복] <아기 늑대 세 마리와 못된 돼지>는 아기 돼지 삼형제 이야기를 연상케하지요. 돼지와 늑대에 대한 고정관념 전환이 무척 인상적인 책입니다. 이 책의 면지는 앞뒤 동일하게 찻주전자와 찻잔으로 반복되고 있어요. 이게 무언가, 궁금해지게 되지요. 이야기 속에서 차는 꽤 중요한 소재로 등장합니다. 돼지가 문을 열어달라고 할 때마다 아기 늑대들은 "우리 집에서 차 마시는 건 꿈도 꾸지마!"라고 외치지요. 이들에게 차는 단순히 음료가 아니라 함께 시공간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중요한 매개입니다. 그래서 돼지의 공격을 피해 늑대들이 도망다닐 때마다 이 찻주전자와 찻잔을 고이 싸들고 다녀요. 마지막 장면에서 돼지를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하는 것이야말로, 돼지와 늑대들 간의 관계 전환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차'는 돼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꽃'만큼이나 중요한 소재입니다. 그리고 그림 작가는 면지에서부터 그 중요성을 부각시켜줍니다.
[주인공의 감정 변화] 앞뒤 면지가 다른 장면일 경우, 그림책에서 어떤 변화가 진행되었구나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앞뒤가 다른 면지를 통해 주인공의 감정 변화를 담은 예시를 볼까요. 서현 작가의 <눈물바다>의 앞면지를 보면 눈물방울들이 모두 울고 있고, 오른쪽 아래편에 있는 노란 얼굴의 아이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반면 뒷면지에서는 눈물방울들과 노란 얼굴 아이 모두 활짝 웃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아이의 슬프고 억울한 감정이 해소되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사건의 전후] 모 윌렘스의 비둘기 시리즈는 무척이나 유명하지요.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유쾌한 캐릭터가 인상적인데요. 모 윌렘스의 책은 본문도 본문이지만 면지가 너무나 재미나요. <The Pigeon Needs a Bath!>의 앞면지에는 진흙탕에 빠져 놀고 있는 비둘기가 등장합니다. 당연히 목욕 안 하겠다고 버티는 본문이 이어지겠지요? 뒷면지에는 목욕탕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비둘기가 등장합니다. 본문에서 무언가 사건의 전환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지요. 그런데 모 윌렘스는 항상 뒷면지에 유머 코드를 숨겨둡니다. 비둘기와 오리 인형의 위치가 변한 단 한개의 목욕탕이 보이시나요? 이런 재미 때문에, 면지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답니다. 참, 동일 작가의 유명한 Gerald & Piggie 시리즈 뒷면지에는 늘 Pigeon이 등장한답니다. 캐릭터가 시리즈의 경계를 넘어가다니. 요런 재미 놓치지 마세요.
[등장인물의 관계 변화] 요시타케 신스케의 <이유가 있어요>, <불만이 있어요>는 아주 유머러스한 책입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아이들의 시각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며, 읽어주는 부모를 뜨끔하게 만들지요. <불만이 있어요>의 경우 앞면지에는 늘 짜증내고 지시하고 거부하는 아빠가, 뒷면지에는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행복한 아빠가 그려져 있습니다. 본문의 대화를 통해 아빠와 아이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가까워지게 되는데요, 이 때 변화되는 부녀 관계를 면지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책날개 역시 서사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앞날개에는 자고 있는 아빠를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아이, 뒷날개에는 '우리 아빠 대머리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아이의 소원을 들은 아빠가 걱정스럽게 머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본문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전후까지 빠짐없이 보여주는 섬세함이 돋보입니다.
2. 타이포그래피
그림책은 문자언어(글자)와 시각언어(그림)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중 문자언어 글자는 기의(의미)와 이를 담고 있는 그릇, 즉 기표로 이뤄져 있습니다. 기표가 시각예술화될 때, 이것을 타이포그래라고 합니다. 즉 글자를 어떤 크기로 어떤 서체로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전달하는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는 작품 전체에 사용될 수도 있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일부에 사용하여 전달하려는 의미를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타이포그래피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자주 예시로 드는 책이 바로 앤서니 브라운의 <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공원에서 하루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를 서로 다른 네 명의 주인공이 자신의 시점에서 풀어내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요. 차갑고 도도한 귀족 엄마, 실직해 상심이 크지만 아이와의 유대관계는 좋은 노동자 아빠, 엄마의 그림자에 짓눌려 애정을 갈구하는 외로운 소년, 그리고 가난하지만 밝고 긍정적인 소녀가 등장합니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워낙 다르다보니 각 인물마다 쓰여진 주조색도 다른데요, 또 한가지 특징의 본문의 서체도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귀족 엄마의 서체는 고전적이고, 외로운 소년의 서체는 어딘지 위축되어 보입니다. 원작 <Voices in the Park>에서는 "Voices"를 각 인물들이 쓴 서체를 섞어 표현하였는데요. 번역본에는 이런 부분이 간과되어 있어 아쉽습니다. 이 책의 전개 구조를 탁월하게 반영한 타이포그래피인데 이 부분이 생략되었으니 말이에요.
강경수 작가의 <나의 엄마>입니다. 엄마라는 한 단어에 이토록 수많은 감정이 들어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하는 책이지요. 딸이 성장해감에 따라 엄마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리고 그 딸이 엄마가 되어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어떻게 되돌려주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대사가 '엄마' 하나 밖에 없는데요. 그림도 그림이지만, '엄마'를 표현한 서체 자체가 그림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예를 들면 자다 깨서 우는 아이의 '엄마'는 심하게 물결치며 울음 끝이 깁니다. 비밀일기에 손대는 것 때문에 화가난 아이의 '엄마'는 크고 격앙되어 있습니다. 느낌표로 방점을 찍지요. 병상에 누운 엄마 때문에 마음이 아픈 딸의 '엄마'는 울음 끝에 가늘게 떨리듯 작고 뚝뚝 끊어져 있습니다. 글씨의 모양만으로도 딸이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이것 역시 타이포그래피의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세계적인 그림책 이론가들이 뽑은 포스트모던 그림책의 대표작!"이라고 당당하게 쓰여 있는 <냄새 고약한 치즈맨과 멍청한 이야기들>입니다. 온갖 명작동화 이야기들이 섞여 들여가며 패러디의 진수를 보여주는데요. 포스트모던 그림책의 대표작답게 타이포그라피를 자유자재로 활용합니다. 차례가 무너져 문장 순서가 엉망이 되는 것부터 시작, 토끼의 머리카락이 쭉 자라는 것의 이미지와 "끝없이 쭉"이라는 텍스트를 한데 엮은 것도, 거인의 발에 눌린 이야기가 찌그러진 것처럼 그려진 것 역시 모두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이포그래피 덕에 이야기에 내포된 정서가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예시를 들며 그림책의 다양한 요소들을 보여드렸는데, 재미있으셨나요? '그림책에 본문 말고도 많은 재미가 숨겨져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부터 그림책을 살펴보시며 재미를 찾아가실 수 있을테니까요.
다음번에는 그림책이 '부모와 아이'에게 왜 좋은지, 그림책의 힘에 대해 써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