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림책의 힘
1. 세계/경험/감정의 확장을 통해 아이의 성장을 돕는다
2. 머무를 줄 아는 힘을 기르도록 돕는다.
3. 상상력과 표현력을 기르는 바탕을 마련해준다.
4.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느끼도록 해준다.
5. 부모 안의 아이를 일깨우고, 자녀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생활과 밀착되어 독자의 공감을 사는 그림책도 있지만, 현실 세계와 멀리 떨어져 있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림책도 많이 있습니다. 현재 내가 발딛고 있는 곳과 전혀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그림책 속에서는 그럴듯하게 펼쳐집니다. 배를 타고 오랜 시간 항해를 하여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도착할 수도 있고(<괴물들이 사는 나라>), 공룡 뼈를 지나는순간 공룡이 살아 숨쉬던 옛 세계로 들어설 수도 있고(<이상한 자연사 박물관>), 엄마가 절대 가지말라던 숲 속에 들어가 옛이야기 속 등장인물들과 마주할 수도 있지요. (<숲 속으로>)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은 불가능한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그림책 작가들은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입구를 자연스럽게 그려내, 현실 - 상상 - 현실의 구조를 결코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림책 속 상상력이 꼭 그렇게 멀리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소소한 사물만 가지고도 그림책 작가들은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지요. 어떻게 보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러고 노니까요. 작은 막대기 하나만 있어도 요술봉으로, 빗자루로, 칼로, 깃발로 변형해가면서 놀 줄 아는 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 아닌가요. 택배 상자 하나로도 충분하지요. 자동차로, 성으로, 기차로, 책상으로 요리조리 돌려가며 놀 줄 압니다. 정형화되어 있는 장난감보다도, 아이들은 이런 일상적이고 단순한 사물 속에서 더 오래 재미를 느끼며 놉니다. 내가 개입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지요.
폴란드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발가락>, <생각연필>, <네 개의 그릇>, <문제가 생겼어요!> 등을 보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이 시절 가지고 있었던 소소한 상상의 능력을 점차 잃어버리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집니다. 침대에 누워 열개의 발가락을 내려다 보며 상상여행을 떠날 줄 아는 작가의 상상력은,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네 개의 그릇>에서도 골판지 2장을 반으로 잘라 4개의 그릇을 만들더니, 이것을 우산으로, 선글라스로, 역기로 무한 변주하며 놉니다. <문제가 생겼어요!> 역시 아이가 실수로 낸 다리미 자국 단 하나가 주요한 소재가 되고요. 엄마에게 혼날까봐 불안한 마음을 기본 서사로 삼으면서, 다리미 자국을 이런저런 소재로 변주합니다.
이런 책을 접하면서 아이들은 상상력, 창의력이라는 것이 굳이 멀리 있지 않음을 자연스레 느끼게 됩니다. 상상력과 창의력은 없는 것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거나 새로운 맥락 속에 존재하게끔 도와주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이들이 주변의 사물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노는 모습 그 자체, 놀이에 푹 빠져 다른 세상에 다녀올 수 있는 그 자체가 이미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그림책들은 그런 아이들의 놀이를 적극적으로 권하고 독려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상상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혼자만의 공상 놀이에 그치지 않고 남과 생각을 나누어 놀 수 있는 것, 잘 이해하도록 내 생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지요. 피터 레이놀즈의 <점>이나 <느끼는 대로>처럼, 메시지를 통해 직접적으로 자유로운 표현을 독려하는 책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그림책 자체의 다양한 표현기법과 재료들이 어린이 독자의 표현력에 간접적으로 자극을 줍니다. 위에서 예시로 들었던 <네 개의 그릇> 같은 경우, 이보나 작가가 흔히 사용하는 콜라주 기법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 특히 이 책은 도서관에서 버려지는 낡은 종이들을 활용해 만들어졌습니다. 크레용이나 색연필을 쥐어주면 마구 선을 그리며 즐기는 아이도 있지만, 그저 얼어버리는 아이도 있습니다. 오히려 점토나 종이처럼 질감이 있는 매체를 만났을 때 더 편안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너의 생각을 표현하는 재료'는 단지 물감, 크레용, 색연필, 싸인펜 같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드로잉 재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러줄 필요가 있습니다. 콜라주 기법의 책들은 주변의 모든 재료가 자기 표현의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자신에게 맞는 재료를 찾는 것 또한 중요한 일임을 가만히 알려줍니다.
<숲 속 재봉사> 시리즈의 최향랑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전통적인 서양화 방식으로 그림책 작업을 하지 않습니다. 사시사철 자연을 돌아다니며 꽃잎, 나뭇잎, 나뭇가지, 씨앗 등을 모아 말립니다. 모두가 그림책 작업의 재료입니다. 그리고 오리고 붙이고 꿰매고 뜨개질하는 등 다양한 공예 작업을 그림책과 접목시키지요. 여리고 보잘 것 없는 자연의 일부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주는 것, 그리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책 세계를 구축해내는 것 - 이것이야말로 상상력과 표현력의 진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좋은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상상력과 표현력의 좋은 바탕을 자연스럽게 전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