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아기띠를 하고 밖에 나가면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아기를 보고 웃었다. 작고 오동통한 손, 아직 걸어본 적이 없어 말랑말랑한 발바닥, 발갛게 익은 두 볼,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똥그랗게 뜬 눈.
나도 그때는 딱 서른 살, 젊은 엄마였다. 고단하고 외로워서 임신 전보다도 살이 쪽 빠져버렸지만, 그래도 갓 30대가 된 엄마의 웃음은 20살을 닮은 구석이 많았다. 아기를 웃기려고 요상한 표정을 지을 줄도 알고, 아기가 웃으면 따라 웃을 줄도 아는 엄마였다.
둘째를 낳았을 때도, 아이들이 자라나면서도, 나는 항상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 첫째도 아직 어렸고,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해도 아직 어린 둘째가 있었다. 어린 아이를 키우니 아직 나도 젊은 엄마. 그렇게 생각하면 없던 힘이 다시 나곤 했다.
시간이 한참 흘렀다. 아이들과 공원 산책을 나간 어느 날 정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운동 기구에 올랐다가 서로 잡기 놀이를 했다가 하며 정신없이 웃고 있었다.
옆에는 두 돌이 안 되어 보이는 아가가 신기한 듯 언니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기 곁에는 엄마가 꼭 붙어서 계속 말을 걸어주고 있었다. 아기는 우리 아이들을 쳐다보고, 아기 엄마는 아기를 쳐다보고, 나는 아기 엄마를 쳐다보고. 그러다 아기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마스크 너머로도 전해질 웃음을 환하게 지으며 말을 걸었다.
“너무 예뻐요~ 몇 개월이에요?”
“두 돌 되어가요. 어휴 전 너무 부러워요....... 저만큼 커서 둘이 노는 거 예쁘네요.”
아, 그 엄마는 꼭 8년 전의 나였다. 우리 아이를 귀여워해주는 초등학생 엄마들에게 “저만큼만 크면 소원이 없겠어요.”라고 하던 나. 늘 쫓아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봐주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줘야 하던 아기는 어디로 가고, 튼튼한 두 다리로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는 아이 둘이 있었다. 하나는 나이가 두 자리 수가 되었고, 하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아, 아이들이 어느새 이만큼이나 컸구나.
나는 더 이상 어린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가 아니었다.
예쁘지도 않은데 젊지도 않다니, 내 인생의 1부는 이렇게 끝나는구나.
지금은 두 돌 된 남의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지만, 큰애 두 돌 때는 아이가 예쁜지 어쩐지도 모르겠고 그저 하루가 무사히 끝났으면 좋겠는 날들도 많았다. 그 시절을 보내는 엄마들에게 그 시절을 지나온 내가 해주는 말은 늘 ‘버텨라’이다. 솔직히 그것 외의 방법을 나는 잘 모르겠다. 웃음소리만큼이나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그 시절을 도저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라고 압축할 수가 없다. 앓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다.
그런데 그런 엄마들이 있다. 갓난아기를 키우면서도 힘차고 아름답게 일하는 엄마들, 아이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엄마들, 아이의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엄마들. 어떻게 저렇게 육아와 일과 글 위로 한 점의 그늘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태양은 왜 늘 저 사람 위로 뜨는 걸까? SNS 뒤에서도 저런 순도 100%의 빛뿐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해보다 먹구름을 먼저 가진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태양만이 가득한 날은 손에 꼽았던 것 같았다. 모르는 걸 들키기 싫어 잽싸게 머리를 굴리고, 못할까봐 손톱을 깨물고, 다른 사람의 말에 내가 뭘 잘못했나 쉽게 마음이 오르내리는, 먹구름과 함께 태어나고 자란 사람. 햇빛은 호주머니에 초콜릿 몇 알처럼 넣어 다니는 사람.
타고난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이를 키우는 내내 더 활력이 넘쳤을 텐데. 아이에게도 더 좋은 걸 많이 해주고, 나를 위한 시간도 더 많이 가졌을 거고. 지금 그맘때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더 희망찬 얘기를 해줄 수도 있을 테지. 앓는 소리 따위 누가 듣고 싶대? 나 앓기도 바쁜데, 그런 걸 누가 들으려 하겠어?
태양처럼 밝고 환데 예쁘기까지 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 천성보다도 얼굴이 마음에 안 들던 날이 더 길었으니까. 까만 피부, 오래도록 쌓인 여드름 자국, 커다란 모공, 숭숭한 털, 낮고 동그란 코. 그나마 피부가 두껍고 튼튼했는데, 아이 키우고 나이 들다보니 주름도 보이고 잡티도 생긴다. 사진 찍는 게 점점 더 싫어진다.
나는 예쁜 여자가 부럽다. 마음이나 글 같은 거 말고 외모가 예쁜 여자. 마음이 예쁘거나 글이 예쁜 건 노력해서 어찌어찌 살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얼굴이 예쁜 건 이생에선 살아볼 수가 없다. 겁이 너무 많아서 눈썹 문신도 못하는 인간이 나다. 어차피 소용없다는 생각에 남들만큼 열심히 관리하지도 않는다.
첫 눈에 띄는 삶 같은 건 두려워 손사래 치면서도, 다음 생에는 모두가 쳐다볼 정도로 예쁜 여자로 태어나보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생각한다. 피부만 좀 좋았어도....... 팔다리는 가늘고 예쁜데. 콧대는 오똑했으면 좋겠고, 쌍커풀도 있었으면 좋겠고, 얼굴은 훨씬 작았으면 좋겠고....... 등등.
모두 예쁘고 캥거루도 예쁠 때까지
강의를 시작하고 책이 나오면서 유튜브를 해보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아유, 영상 박제되는 거 너무 두려운 일이에요. 강연에서의 만남은 잔상으로 남고 글과의 만남은 상상의 여지가 있지만, 영상으로의 만남은 적나라하고 영구적으로 남는다. 나의 외모, 제스처, 목소리, 습관 같은 것들이 짧은 영상에 다 드러난 채 전시되는 걸 감당할 만큼의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내가 좀 더 밝고 예쁜 사람이라면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다시금 권유하는 지인에게 "얼굴에 자신 없어서 유튜브는 안 해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는지 놀라던 지인은 다음번 만남에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에밀리 디킨슨의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였다. 어쩜 제목이 이래요, 우리는 마주보며 웃었다.
“나의 일은 맴돌기랍니다- 관습을 몰라서가 아니라 동트는 모습에 사로잡혔거나- 석영이 나를 보고 있으면 그래요-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예요, 선생님,"
-히긴슨에게 보낸 디킨슨의 편지 중
디킨슨이 쓴 편지에서 캥거루는 “예쁨”과 반대되는 “추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예쁜 것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주변에서 빙빙 돌고 있는 이방인 같은 존재를 캥거루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그 문장 하나가 콕 박혔다. 몇 번이고 입에 올려 읽어보았다.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모두 예쁜데, 모두 예쁜데........
“글도, 마음도, 얼굴도 예쁜 유진 쌤에게”
시집 앞에는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글쎄, 예쁜가? 다정한 말이지만 거울에서 내 얼굴을 아무리 뜯어봐도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나만 캥거루인 그 마음만큼은 알겠다. 숨기려 해도 덩치나 생김새 때문에 도무지 숨겨지지 않는 나의 질투는, 꼭 캥거루의 모양을 한 채 덤불 뒤에 숨어 있었다. 자기 얼굴만 가리면 아무도 자기를 못 보는 줄 아는 두 살 아기처럼, 어리석게.
얼굴만 안 예쁜 줄 알죠. 사실 나는 글도 마음도 예쁘지 않아요. 내 우물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당신이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거예요. 갖지 못한 것을 질투하고, 질투하는 나를 미워하고, 미워하는 나를 버려두고.
들킬까봐 겁을 내면서도 우물 제일 깊은 곳에 낀 이끼를 긁어내 이렇게 꺼내어 놓는다. 내 얼굴을 내 몸을 내 천성을 사랑하는 데 미숙한 사람이라 괴로웠지만, 이제라도 그걸 꺼내어 마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미숙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누구보다도 내게 말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투로 자기를 불태우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럴 때가 많다고 손잡아주고 싶기 때문이다.
아기띠에 매달려 다니던 첫째는 이제 어엿한 11살이 되었다. 수영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첫째 어깨에 손을 올려보면 어깨가 제법 단단하다. 손을 올리고 함께 걸어도 편안할 정도가 되었다. 예전에는 손잡고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너무 작아서, 손잡은 쪽으로 항상 몸이 기울어진 채 걸었다. 지금은 손을 잡아도 팔짱을 껴도 어깨동무를 해도, 몸이 기울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나란히 즐겁게 집으로 걸어간다.
11살도 8살도 이제 아이 자신만의 태양을 가지고 계속 커나갈 것이다. 세상과 부딪히다 보면 먹구름도 호주머니에 몇 개쯤 넣어두겠지. 내가 더 줄 것은 이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나의 젊음과 아름다움 중 많은 부분은 아이들에게로 흘러갔다. 내게서 사라진 것들이 아이 안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버틸 만 했다.
이제는 아이에게 무얼 주어야 하나 고민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이 가진 밝은 천성과 아름다운 외모에 연연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다. 더는 삼십대만큼 젊지는 않더라도 사십대에서는 제일 젊다. 예쁜 얼굴은 아니더라도 예쁜 글과 예쁜 마음으로 살고는 싶다.
그러려면 누구도 아닌 내가, 누구도 아닌 나에게 줄 것들의 목록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 목록을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보라색 잉크로 기꺼이 써내려가고 싶어졌다.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가 아니라, ‘모두 예쁘고 캥거루도 예쁘고‘가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