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말 한마디에 담긴 품격

by 안개별


성별이 다른 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180도 다른 성격과 성별 탓인지 아이들마다 저마다의 색깔이 매우 달랐다. 여아인 첫째는 시원시원한 성격을 가졌지만 자주 얌전했고 차분했다. 반면 남아인 둘째는 타고난 내향인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그러다가도 문득문득 와일드한 기질이 드러났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것처럼 몬스터 또는 악당들과 싸우듯 모션을 취하거나 말을 내뱉는 등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어린이지만 남자라고 힘이 셌기에 제법 아팠다.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나 피를 보기도 했다. 그 어떤 것보다 어린이집에서 생활하는 다른 친구들이 다칠까 걱정이 되었다.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그런 일이 생길까 꾸짖고 훈육하는데 힘을 쏟았다. 어린이집에서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되려 피해를 입고 돌아오는 편이었다. 허벅지를 밟혀 멍이 들고, 누군가와 부딪쳐 코피가 나고, 얼굴을 긁혀 오는 건 아들이었다. 내향인이었다는 걸 깜빡했던 걸까. 집 안에서 하는 행동과 어린이집에서의 행동은 많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웃프게도 이후로는 방어 기술을 가르쳐야 했다.


어느 날부터 '죽여버리겠다.'는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누나와 장난치다가 불리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엄마에게 서운하거나 피곤함이 몰려오면 그 말을 내뱉곤 했다. 화가 났음을, 속상함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몰랐다. 괜찮아, 아직 어린이니까. 몰랐던 사실들은 하나씩 알려주고 고쳐나가면 되지. 자주 지적하며 잘못된 말임을 인지시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횟수는 잦아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아이는 그 말을 툭 꺼내 놓고서는 두 손바닥으로 입을 꼬옥 막았다. 하면 안 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듯 보였다. 아들에 대한 걱정이 자꾸만 쌓여만 갔다.


둘째가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날이었다. 식판 앞에서 금세 잠들 것 같은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적당히 배는 채웠겠다 싶어 얼른 씻기고 재워야겠다 마음먹었다. 아이를 안아 품에 넣고 화장실로 냅다 향했다. 옷을 벗기고 샤워 부스로 들어가는 사이, 둘째의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피곤함에 소리를 지르며 버티는 아이를 씻기고 양치에 치실까지 끝내는 동안 내 등은 어느새 땀으로 축축해졌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여주는데, 아이가 갑자기 외쳤다.


"엄마, 죽일 거예요."


부스 밖으로 나와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힌 뒤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을 나왔다. 안방 침대에 앉아 훈육을 시도하려고 얼굴을 마주했다. 조금 전까지 말갛던 얼굴이 파래져 있었다.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엄마의 표정만 봐도 분위기를 빠르게 읽어내는, 눈치 백단인 아이였다.


"엄마, 미안해."

"죽인다는 얘기 하면 안 된다고 했지. 나쁜 말이라고 했잖아.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6살 아이는 여전히 발음이 명확지 못했고 말도 조리 있게 할 줄 몰랐다.


"그 말을 왜 계속하는 건지 얘기해 줘. 엄마 기다릴게."


아이의 입이 움직였다. 잘 들리지 않았다. 오물오물. 무어라고 말은 하는데 도통 들리지가 않는다. 내가 너무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싶어 목소리에 약간의 부드러움을 담았다.


"왜 죽인다는 말을 한 거야?"

"지우고 싶어요."


아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걸 지운다니. 갑자기 무슨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얼 지우고 싶냐고 다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 떠올랐다.


"아까 엄마를 죽일 거라고 했던 그 말을 지우고 싶다는 거야?"

"(끄덕) 지워 주세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오는 애처로운 이 어린양을 어찌 못 본 척할 수 있겠는가.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순간 웃음이 터져버렸다. 허벅지를 꾸욱 누르며 참았는데 아쉽게도 견뎌내지 못했다. 스무고개 놀이하듯 나름대로 해석한 것들을 재차 묻고 또 물어가며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실수였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그 말이 엄마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 엄마의 기억 속에서라도 그 말을 지워달라는 부탁이었다. 아주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눈물 쏙 빠지게 혼쭐을 내주려고 했는데 다 망쳐버렸다.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와서 그럴 수가 없었다. 녀석의 순수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비스킷처럼 딱딱하던 마음이 젤리처럼 말랑해졌다. 내가 졌다. 유 윈이다(You win).



삼사일언(三思一言) 하라고 했다. 세 번 생각한 후에 한 번 말하라고.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주워 담을 수 없고, 그 시간 또한 다시 되돌릴 수 없기에 말을 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말은 곧 자기 자신이다. 말 한마디로 품격을 나타낼 수도, 바닥을 드러낼 수도 있다. 스스로를 높일 줄 아는 사람은 상대를 높이는 말과 행동을 할 줄 알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할 말들을 평생 담고 살아간다. 상대를 깔아뭉개고 자신을 높이는 미련한 방법을 택한다. 정작 그건 스스로를 끝없는 바닥으로 내모는 선택이라는 걸, 선택과 의지에 의해 삶을 변화시키고 가꾸어갈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걸까.



신이 인간에게
한 개의 혀와 두 개의 귀를 준 것은
말하는 것보다 타인의 말을
두 배 많이 들으라는 이유에서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



다음 날, 아이에게 에픽테토스의 말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에게 한 개의 입과 두 개의 귀가 있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 대로 쉬이 모든 말들을 다 내뱉어버리고 후회하는 일은 이제 하지 말자고. 역시나 인체를 활용한 교육은 이해가 쉬웠다. 아이는 내 말을 깊이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아이가 먼저 작고 고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린 손가락 걸고 도장까지 찍으며 꼭꼭 약속했다. 다시는 나쁜 말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정한 마음이 오래도록 계속 유지되면 좋겠다고, 마음을 다해 소원했다. 그리고 아이의 바람대로 그날의 기억은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렸노라고 얘기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아이의 입꼬리에 답하는 마음으로 빙그레 웃어 보였다. 따뜻함과 다정함을 가득 담아.

keyword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