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상 속 모습과는 달리 구매에 있어서는 굼뜬 모습의 나무늘보가 되어버린다. 결제 전 단계에서 유난히 신중해지는 탓에 어느 것 하나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 무언가 사고 싶은 것이 생기면 최소 일주일은 고민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 충동적으로 소비하고 후회하는 건 아닐까. 내 손안에 들어와 사용하게 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그 물건이 얼마큼의 효용가치를 지닐 것인지를 판단한다. 버려지는 물건들이 어지간히 아깝다는 걸 깨닫게 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집안의 가계를 책임진 이후로 계속 그래왔다.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감정에 이끌리기보다는 이성적으로 충분히 생각한 뒤 필요에 의해 카페를 들어가곤 했다. 천 원짜리 한 장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통장의 잔고를 보는 일만큼 행복한 일도 없었기에 그렇게도 아끼며 살아왔다.
오랜만에 눈치 보지 않고 6시 칼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하면 7시가 훌쩍 지나 있었지만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었기에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전날보다 5분이라도 빨리 퇴근하는 날이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우린 서로를 마주 보고 식탁에 앉았다. 재잘재잘.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오물오물. 허기진 배를 채우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귀와 입으로 삼켰다. 불러오는 배의 크기만큼 마음도 한껏 차올랐다. 푸지고 넉넉한 그 마음은 참으로 따숩고 포근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지금만 같아라.
식사를 다 마쳐가던 중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병원에 있는 남편에게서 온 카톡일 터였다. 휴대폰 가까이에 앉아있는 첫째에게 휴대폰을 건네 달라고 부탁했다. 휴대폰을 건네고 받는 손이 어긋났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졌다. 휴대폰을 감싸고 있던 플라스틱 케이스가 깨져버렸다. 뎅강 두 동강이 나버렸다. 아까워라. 떨어졌던 휴대폰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장 첫 번째로 든 생각이었다. 구매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기에 버려져야 할 그 물건이 상당히도 아깝게만 느껴졌다. 미간이 일그러지며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엄마, 미안."
떨어진 휴대폰의 상태를 확인하느라 그걸 건넸던 첫째 마음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입술을 한가운데로 잔뜩 오므리고 시선을 바닥으로 한껏 떨군 그녀의 모습에 아차 싶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속마음을 모두 꺼내 놓은 셈이 되어 버렸다. 때론 비언어적 표현이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못났다 정말.
"엄마, 보세요. 화면은 괜찮아요. 여기(휴대폰 케이스)만 깨진 거예요. 계속 볼 수는 있으니까 다행인 거지요."
일순 정적이 깨졌다. 6살 둘째의 한껏 상기된 목소리가 침묵을 깨부수었다. 목을 쭈욱 빼고 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아이는 진정 신이 나 있었다.
정확지는 않은 발음이었지만 의미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휴대폰이 깨지지 않은 게 어디냐고. 이를 천만다행으로 여기라는 고차원의 훈계를 엄마에게 넌지시 건네고 있었다. 이를 들은 첫째가 내 휴대폰을 뺏어 들고 이리저리 뜯어 살피며 상태를 확인했다. 정말이지 상처 난 곳 하나 없었다. 온전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엄마, 봐 봐. 화면도 잘 보이고 흠집 하나 없어. 와아. 진짜 다행이다. 그치?"
"진짜네. 어쩜 이래. 떨어뜨렸는데 상처 하나 없어. 이거 정말 럭키비키잖아?"
첫째가 제일 좋아하는 연예인의 유행어를 따라 하며 휴대폰도 엄마도 문제가 없음을 알렸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했던 것처럼 양 손바닥을 쫙 펴고 입 근처에 갖다 대며. 아이들이 웃었다. 나도 따라 미소 지었다.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유감없이 웃었다.
얼마 전 서류를 쓸 일이 있어 주민센터에 방문했다. 나이를 쓰는 공란을 보고는 잠시 주춤했다. 내 나이가 몇이더라. 기억이 나지 않아 손가락을 펴고 세어야 했다. 만으로 서른일곱. 오래도 살았다. 삼십여 년을 살아오며 그 긴 시간 동안 고집스럽게도 지켜왔던 신념과 습관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내가 지켜온 것이자 나를 지켜낸 것들이기도 했다. 사랑, 신뢰, 의리, 배려, 양보, 긍정, 확신, 절약 등 내가 정한 것들에 대해서는 타협이란 없었고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다. 상황에 따라 부수적으로 추가되어야 하는 것들. 또 다른 관점에서의 헤아림이 필요한 것들. 내 고집만 주장하고 신념만 지켜내느라 인생에서 놓치고 살아온 것들이 꽤 많았다. 어렸던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아쉬웠던 순간들이 가득했음을 깨닫는다. 겪어보지 못했기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더 늦지 않게 자각하고 변화하고자 노력할 수 있어서 차라리 다행인 건지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고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선순위 선정이 필요하다. 지켜왔던 신념과 현재의 상황이 잘 어우러져 기준을 만들고 그것이 관점이 되어 중요도에 따라 별점을 주는 일 말이다. 내뱉어버린 말에 그 누구도 속상하지 않도록, 저질러버린 행동에 뒤늦게 후회하는 일 없도록. 찰나의 순간이 궂은 기억으로 잠식되어 끝도 없는 늪으로 스스로를 끌고 들어가지 못하게, 그렇게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