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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by 안개별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감을 짊어지는 일이고,

엄마가 된다는 건

그 무게를 사랑으로 감당하는 일이다.



아주 가끔,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아침이면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총알과 수류탄만 날아다니지 않을 뿐, 이곳은 전쟁터가 확실하다. 식탁 아래 잔뜩 널브러져 있는 밥풀과 반찬들,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고민하다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 옷가지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독서를 하겠다며 여기저기 책을 늘어놓고 다니는 아이들. 어김없이 또 그랬다. 낯익은 풍경이었다.

바빠 죽겠는 엄마와는 달리 아이들은 꽤 느긋하다. 마치 시계 없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듯 여유롭기만 하다. 어쩌겠는가, 바쁜 내가 챙겨야지. 엄마가 꺼내준 건 입기 싫다면서 투덜대는 첫째에게 옷을 억지로 입혔다. 입이 뾰로통하게 나온 그녀를 현관에서 배웅했다. 말을 하도 듣지 않아 큰소리로 다그치는 바람에 눈물을 살짝 보였던 것도 같은데. 휴, 모르겠다.


둘째의 등원까지 완료하고 나서야 첫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윽박지르지 말걸, 소리치지 말 걸, 울고 있는 아이를 잠시라도 안아줄걸. 10개월의 임신 기간과 출산을 거치며 충만했던 모성애는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어쩜 그리도 매몰찼을까. 그 순간,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토끼 한 마리를 앞에 두고, 금방이라도 꿀꺽 삼켜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설고도 잔인한 표정을 짓고 있진 않았을까. 그게 진짜 내 모습일까. 엄마가 돼서는 어쩜 그리 감정적이었을까. 양손으로 머리채를 틀어쥔 채 고개를 푹 떨궜다. 입 밖으로 탄식이 절로 나왔다. 지나가 버린 순간을 붙들고 싶지만, 되돌릴 수가 없다. 오전 내내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정신없던 하루가 저물고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먼저 잠이 들어버린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다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카락을 거듭 쓸어본다. 말랑말랑, 보들보들 부드러운 살결에 자꾸만 손이 간다. 그들이 귀찮아할 줄은 알지만 쉽사리 멈출 수가 없다. 작고 여리기만 하던 아기였는데,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거지. 정신없이 키우다 보니 그 예뻤던 모습들을 더 많이 눈에 담아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블로그를 한답시고 사진과 영상으로라도 많이 담아두었으니 다행인 건가.

첫째의 손가락을 하나씩 조물조물 만지작거리던 순간이었다. 불쑥 그녀의 손바닥이 활짝 펴지더니, 내 손등을 덥석 감싸 쥐었다. 뜻밖의 움직임에 놀랄 겨를도 없이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긴 하루를 단숨에 보상받는 듯한 기분. 조막만 한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이 내 마음을 녹여내렸다. 마치 “고생했어요”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내가 짊어지고 있다고 믿었던 엄마로서의 무게는 어쩌면 아이들이 건네는 사랑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혼자 어깨에 몽땅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는 그 무게 덕에 온전한 어른 일 수 있었고, 난생처음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조금은 다르게 그 무게를 품어야겠다. 짐짝마냥 미간을 찌푸리며 힘겹게 짊어지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지. 완벽한 엄마여야 한다는 압박, 모든 걸 다 해내야 한다는 강박, 아이의 하루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과한 의무감.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더 짓눌렀고 피폐하게 만들었음을 이제는 안다.

밥풀 몇 알 바닥에 굴러다니면 어떠랴. 걸레로 스윽 닦으면 그만인 것을. 옷더미가 잔뜩 쌓여있으면 어떠랴. 잠시 쉬었다 개면 그만인 것을. 그게 힘들다면 다음 날 해도 될 테고.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는 여전히 버겁다. 하지만 그 무게를 끝까지 끌어안으려 애쓰기보다는, 아주 조금씩 내려놓으며 잠시 쉬어가려 한다. 그래야 남은 무게를 오롯이 감당할 수 있을 테니. 무게를 덜어낸 자리엔 여백이 생길 것이고, 그 안에서 사랑이 자라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고단한 하루를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줄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서툴고 부족해도 괜찮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이가 원하는 건 결점 없는 엄마가 아니라, 늘 곁에 있어 주는 엄마라는 걸 절대로 잊지 말자고. 그러니 엄마로서의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야지. 부족한 나라도 괜찮다고 말해줘야지. 그렇게 매일, 사랑을 키우고 가꾸며 오늘을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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