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수 없으니 살아지는 거야."
누군가는 어깨에 얹은 무거운 책임 때문에, 누군가는 가슴에 품은 광활한 꿈이 있어서라고 말하겠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오직 무력함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라지는 법을 알지 못해 수없이 많은 시간들을 건너왔고, 나를 아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떠올리니 마음먹었던 그 일은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포기할 힘조차 없어서 그저 살아진 날들이었다. 그 하루들이 겹겹이 쌓여 한 달이 되었고, 일 년이 되었고, 십 년이 흘렀다.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되었다.
고단했다.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단'이 '고난'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을 만큼. 작디작았던 아이는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의 무게를 알아 버렸다. 품지 않아도 될 감정과 수반되는 고통을 오롯이 홀로 견뎌야 했다. 그게 미련을 떠는 일이었다는 걸,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걸, 스무 살이 한참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고단함은 고난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감정이었다. 삶은 사춘기 소녀에게 이해보다 버티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시간만 주어지는, 그저 버티고 견뎌야 하는 유도 경기처럼.
삶은 고난의 연속이 아니라,
극복의 연습이라고.
우리는 극복하며 살아가는 거야.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더 멋진 나를 위해.
그러니까 포기하면 안 돼.
포기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 김민서, 《율의 시선》
마흔을 앞둔 시점 책의 끝자락에 이 문장을 만났고, 나는 그냥 목놓아 울어 버렸다. 미처 지워내지 못한 고통의 순간들이 필름처럼 되감기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저 살아냈기 때문이 아니라 극복의 과정 속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힘들었던 시간들을 견디며 고난의 껍질을 한 풀 한 풀 벗겨낸 끝에 남은 것들. 고난을 이겨내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쉼 없이 몸부림치던 수많은 시간의 흔적이었다.
그저 살아내고자 버티던 날들은 어쩌면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변화의 과정이었는지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삶에 스민 진동은 일상과도 같았다. 흔들리다 넘어지기도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건, 긴 터널 끝 어딘가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내 삶을 찬란하게 비춰줄 거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었을까.
지금 흔들리고 있다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다. 멈추지 않았다면 실패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극복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며, 충분한 연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결승선에 다다르지 못했을 뿐, 여전히 목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수많은 이력을 가진 사람도,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도, 수백 번, 수천 번 넘어지고 다시 일어섰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작은 작고 미약하지만, 끝은 비범하고 창대하리라. 포기하지 않으면, 우린 무엇이든 변화시킬 수 있다.
어쩌면 흔들린다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흔들려도 괜찮다.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극복을 연습한 당신은 자신의 삶을 재건하는데 도가 텄으니, 오늘의 흔들림도 결국 이겨낼 것이다. 반복되는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극복을 연습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