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 케이크 사주세요

by 안개별


바야흐로 한 달 전의 이야기다. 쉽게 까무룩 잊어버리는 깜빡 기억장치를 가진 나에게도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었나 보다.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 보니.



우리 집 둘째는 말을 참 예쁘게 하는 편이다. 집에서 그 누구도 존댓말을 쓰지 않건만, 신기하게도 이 아이의 입에서는 꼬박꼬박 존댓말이 튀어나온다. 게다가 인사성도 밝다. 모르는 사람과도 눈이 마주치면 아주 밝은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콧소리 섞인 애교 있는 말투와 아이답지 않은 성숙함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아파트 단지 곳곳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은
"고놈, 참 잘생겼네."
"귀엽기도 하지."
하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건넨다.


그러나 그런 아이에게도 화가 폭발하는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바로 피로가 몰려와 잠이 쏟아질 때다. 만 다섯 살 아이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때마다 뾰족한 훈육 방법을 찾지 못해 난감하기만 하다. 가끔은 뜻도 모른 채 내뱉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중에서 유독 나를 놀라게 했던 말은 이 한마디였다.

"엄마, 죽일 거예요."


우리 부부는 둘째 앞에서 큰소리를 내거나 다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맹세코 단 한 번도. 각자의 생활이 너무 바쁜 탓에 마주 앉아 함께 식사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싸울 체력도 없었고, 싸워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째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은 무척이나 뜻밖이었다. 꾸짖고 혼도 내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화가 나면 어김없이 알고 있는 가장 나쁜 말인 '죽인다'는 말을 내뱉었다.



어느 날 둘째가 해서는 안 될 말을 또다시 했고, 아이는 아빠에게 난생처음 혼이 났다. 해서는 안 될 말이라고 얘기했지만 계속 그 나쁜 말을 되풀이했다. 사과하라고 말했지만 드러누워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며 두 다리로 나를 차기 시작했다. 아무리 말려도 도통 말을 듣지 않자, 남편도 순간 욱하고 감정이 올라왔다. 그리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에게 도움을 청해 보지만 훈육이 먼저였다. 안아달라는 아이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결국 아이는 울면서 문을 쾅 닫고 침대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어안이 벙벙해진 나와 남편은 서로를 마주 보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일단락 지었다. 자고 나면 괜찮을 거라고, 남편도 아이도 마음을 조금 진정시킨 뒤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


그렇게 20분쯤 지났을까. 끼익 소리가 나며 안방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둘째가 얼굴 빼꼼 내밀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발을 떼지도 않았고 슬픈 눈으로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들, 할 말 있어?"

10여 초간의 적막, 그리고 아이가 입을 떼었다.

"블루베리 케이크... 사줄 수 있어요?"


찰리 맥커시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의 말》


찰나의 순간, 찰리 맥커시의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 이 떠올랐다. 책을 볼 때는 크게 공감하지 못했던 장면 하나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두더지가 처음 케이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소년을 만나 좋아하는 말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두더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 시도해서 잘 안 되면 케이크를 먹어라."

"그럼 괜찮아져. 늘 그랬어."


두더지에게 케이크는 위로이자 회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디저트를 넘어 마음을 보듬는 방식이었다. 속상할 때마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쉼표가 되어주었고, 흔들린 마음을 다잡아주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좌절하고 포기하기보다는 회복을 통해 다시 나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아이가 케이크를 사달라고 한 이유를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찰리 맥커시의 책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분명 사과부터 하라며 아이의 태도를 나무랐을 것이다.

그래서 난 블루베리 케이크를 사달라는 아이의 부탁에 피식하고 그냥 웃어버렸다.

"지금 갈까?"


우리는 카페로 향했고, 달콤한 케이크를 먹으며 약속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하지 않기로. 사랑하는 마음만큼 가슴으로 품어주기로.

그리고 화가 밀려올 때마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달콤하게 해결하기로 했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 사주세요."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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