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살아가렴, 너답게

by 안개별


"이번 겨울은 춥지가 않네."

작년 12월 말, 나도 모르게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주변에서는 독감이다 뭐다 해서 자주 병원을 드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집 아이들은 쌩쌩했다. 두 아이 모두가 아프지 않은 겨울을 보내고 있다니. 나는 그 이유를 춥지 않은 날씨에서 찾았다.

다행이다. 이번 겨울은 무사히 넘길 수 있겠구나. 잔뜩 긴장해 딱딱해져 있던 가슴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하늘에 감사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고 여겼다.


매년 맞는 예방주사 덕에 겨우 독감만 피했을 뿐이지, 아이들은 겨울만 되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쏟아지는 콧물 탓에 늘 훌쩍였고, 밤마다 가래 끓는 듯한 기침을 했다. 그런 연유로 깊이 잠들지 못해 늦잠을 자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는 겨울이 다 끝나고도 폐렴으로 입원한 적도 있었다. 그것도 둘 다, 동시에 말이다.


성급한 판단이었다. 아직 1월이 채 오지도 않았는데, 마치 겨울의 한가운데라도 있는 양 안심해 버렸다. 제대로 설레발을 치고 만 모양이다.

아이들은 새해 초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생애 처음으로 독감에 걸렸다. 의사 선생님이 그랬다. 올해는 변이가 심해 예방접종을 맞아도 걸린다고, 그저 운이 나빠서 걸린 것뿐이라고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새해를 맞아 소원으로 딱 하나, 가족의 건강만을 빌었다.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까. 어딘가에 신이 있다면, 이 정도쯤은 들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많은 것들을 앗아 갔으니 이 정도는 남겨줘도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독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고열과 심한 기침 탓에 퇴근하자마자 아이들을 데리고 야간진료를 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코를 깊숙이 찔린 뒤에야 독감이라는 병명을 들을 수 있었고,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첫째는 열이 펄펄 끓었다. 해열제를 먹여도 그때뿐이었다.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기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다 타고 남은 나뭇가지처럼 바스러지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둘째는 컨디션이 아주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기침이 잦았고,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해도 소리가 너무 작아 귀를 가까이 대야 겨우 들릴 정도였다. 몇 번이고 "뭐라고?"하고 되물어야 했다. 목소리가 아니라 숨소리에 가까웠다. 그는 희미한 소리로 겨우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일어나 열을 재고, 해열제를 먹이고, 따뜻한 물을 몇 모금이라도 먹이는 것 말고는.



병원을 다녀온 다음 날, 가족들 중 가장 먼저 눈을 뜬 둘째가 "엄마,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전날에 비하면 상태가 눈에 띄게 나아 있었다. 항생제를 한 차례 복용했을 뿐인데 몸 컨디션도 목 상태도 한결 좋아졌다. 약은 늘 그렇듯, 몸보다 마음을 먼저 진정시켜 주었다.

늦은 시간까지 진료를 보던 그 병원이 문득 떠올랐다. 괜히 고마운 마음이 들어 다음에는 간식이라도 한 손 가득 들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와의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잠시 후, 녀석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과 눈을 동시에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엄마, 유치원에 전화했어요?"

독감은 친구들에게 쉽게 옮길 수 있다며, 당분간 유치원에 가지 못한다고 말해 주었던 게 기억난 모양이었다.

"아직 선생님이 출근을 안 해서 아홉 시쯤 전화하려고. 독감이라 며칠 쉬다 간다고 꼭 말씀드릴게."

착하기도 하지. 자주 깜빡하는 엄마가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 꺼낸 말이었을 것이다.


늦은 출근 덕에 아이와 함께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아파서 그런지 도통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책을 읽어주는 내내 아이의 시선은 책과 거실 한쪽 벽을 오갔다.

"승기야, 어디를 그렇게 보는 거야?"
"시계요. 아홉 시 되면 엄마한테 말하려고요."

아이는 내가 유치원 선생님께 잊지 않고 전화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나 보다.

"엄마가 잊어버릴까 봐 그러는 거야?"

"네. 선생님이 걱정할 거예요."

아픈 와중에도 아이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여전히 미열이 올라와 볼이 불그스레한 아이를 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어쩜, 이리도 고울 수가.

너는 아마 모르겠지. 네가 이렇게 마음 따뜻한 아이였다는 걸. 아픈 와중에 자기 몸보다, 자신을 기다릴지 모를 누군가의 시간을 먼저 걱정했다는 걸.

그러니 자주 기록해야지. 넌 아름다운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온함을 건네던 아이였다고 말이야.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마음이 얼룩질 때가 오더라도 잊지 말라고. 지금의 너를 상기시킬 수 있게 몇 번이고 꺼내어 이야기해 줘야지.


어른들이 숨 쉬고,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네가 상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를지도 모르지. 마음을 내어줄 여유가 없는 날도 많을 거야. 그래도 부디 지금처럼 살아가렴. 너답게.

예쁜 마음 가득 안고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보고, 할 수 있는 만큼 나누며, 너의 속도로 세상을 그려가렴. 초연하고 순후하게, 발맘발맘 유유히.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16화아름다운 것들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