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곧 출간 작가가 된다는 사실은 나의 자부심이 되어 주었다. 별볼 일 없고 보잘것없던 내 삶에 듬성듬성 꽃가루가 뿌려진 기분이랄까. 구린내가 가득하던 과거의 내 인생이 조금은 향기로워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작가라는 수식어가 내 이름 앞에 붙는다는 상상만으로도 내가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래전에 훼손되어 버린 나의 자존감이 회복 단계를 거치며 본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출판사와의 미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공모전에 제출했던 원고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엉성하기만 한 원고를 서너 차례 봐가며 수정 작업을 거쳤다. 볼 때마다 수정 사항이 추가되었지만, 시간을 마냥 출간에만 투자할 수는 없었다. 평일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8시였고, 주말은 아이 둘을 홀로 돌봐야 했기에 시간적 여유가 상당히 적었다. 그렇기에 적당한 선에서 퇴고 작업을 마쳤고, 미팅을 함께 진행했던 마케팅 담당 대리에게 메일로 수정 원고를 발송했다. 그리고 며칠 후 도착한 회신. 보낸 원고를 확인했다는 멘션과 함께 책 표지 일러스트 작업을 위한 레퍼런스를 보내라는 메일을 받았다. 레퍼와 함께 원하는 색감을 선정하라는 문구도 발견할 수 있었다.
- 레퍼런스 사진 : 첨부한 4개의 사진 참고
- 선호하는 색상 : 코랄 / 오렌지
핑크와 오렌지가 잘 배합된 코랄 또는 오렌지 색감을 기대하며 위와 같이 메일 회신을 마쳤다. 가장 좋아하는 색상이기도 했고, 내가 쓴 글과도 잘 어울리는 컬러라고 생각했다. 겨우 레퍼런스 컷을 보내는 출판 프로세스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지만, 벌써부터 표지에 대한 기대를 한아름 안게해 주었다. 자주 들르는 서점에 나의 책이 올려져 있을 상상을 하니, 매일이 싱그러웠고 매 순간이 향기롭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하루 온종일 책과 함께하는 첫째 딸에게 나의 책은 좋은 선물이 되어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의 꿈인 그림 작가가 되기 위해 다각도로 정진하게 만들어 줄 특별한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얼마 뒤 도착한 메일 한 통. '표지 시안'이라는 제목의 메일이었다. 담당 편집자가 정해진건지 마케팅 담당 대리의 메일 주소는 참조란에 들어가 있었다.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녀로부터 온 메일을 열었다. 물론 처음부터 내 기대에 부응하는 일러스트가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스텝으로 내가 어떤 요청을 해야 할지를 시안이 나오기 전부터 머릿속에 그려 나갔던 것 같다. 이어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했다. 표지 시안은 총 3가지였기에 그중 하나는 마음에 들겠지 싶은 마음으로 파일을 하나씩 차례로 열어보았다.
혹시라도 당시의 내 기분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휴대폰에 저장해 두고 보고 또 봤다.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스무번을 봤지만 마음에 드는 시안은 없었다. 디자이너에게 대놓고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정말이지 너무나 촌스러웠다. 십여 년 전에도 그런 일러스트는 쓰지 않았을 것 같았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표지 시안을 바라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바쁜 시간을 할애하며 열심히 레퍼런스를 찾고 추려 보냈음에도 내가 상상했던 느낌은 단 1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지. 레퍼런스 사진도 전달이 되지 않은 건가.'
의심부터 들었다. 한참을 고민만 하다 마케팅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의 또는 미팅 중이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아 문자를 남겼다. 십여 분 뒤, 콜백을 받을 수 있었다.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솔직히 시안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레퍼 전달은 잘 된 건지, 원하는 디자인으로 다시 요청해도 되는 건지 등을 물었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그렇게 디자이너에게 다시 한번 레퍼런스 사진과 원하는 바를 자세하게 기재하여 메일을 발송했다. 다시 수정해 보겠다는 회신을 받았고, 다시 한번 전달될 표지 시안에 대한 기대를 한번 더 가져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며칠 뒤 또 한 번의 표지 시안을 받을 수 있었다. 디자이너의 감정이 상할 것을 우려하여 내가 말을 빙빙 돌려서 한 탓일까, 요청했던 사항들이 이번에도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인물의 표정 묘사에 집중하기보다 멀리서 전신이 보이게끔 그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전 시안에서 일부만 수정했을 뿐이었고, 오렌지 색감은 시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두 번이나 발송했던 레퍼런스 일러스트들과 비교하여 어느 곳 하나 비슷한 구석을 찾지 못했다. 이쯤 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책 출판은 수익출판이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가장한 신규 사업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마케팅 수단일 뿐인 건가. 게다가 나와 함께 공모전에 당선된 이들은 두 명이나 더 있었으니, 이쯤 되면 나는 버카(버리는 카드)인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찔끔찔끔 이제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기 시작한 자존감이 다시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두 번의 시안 수정을 요청하였고, 총 3회에 걸쳐 시안을 받았다. 고민에 고민을 더하여 수정을 요청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반영이 되지 않았던 이유로 이게 최선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쉬움은 가득 남았지만 마지막에 받은 시안 중에서 선택을 하기로 했다. 처음 가졌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표지 디자인 작업에 속상함만 자꾸 묻어났기에,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놈의 일러스트가 뭐라고. 내 감정이 널을 뛰듯 솟아올랐다 땅으로로 순식간에 꺼져버리는 경험을 몇 번이고 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표지 그까짓 거 뭐... 내실이 중요한 거 아니겠냐며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