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개별 Oct 30. 2024

표지 디자인 확정

가장 어려웠던 작업, 일러스트 셀렉


나의 첫 에세이집 제작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퇴고 및 원고 발송 

→ 표지 일러스트 선정 

→ 내지 디자인 & 레이아웃 확정 

→ 인쇄 및 제작 → 서점 배포 및 마케팅


위와 같은 단계를 거치며 책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표지 디자인을 확정하기 위한 단계를 진행 중에 있었다. 큰 기대와는 달리 썩 마음에 들지 않은 촌스런 감각의 일러스트를 수차례 받으며 그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더는 큰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마지막 시안이 첨부된 메일에 그대로 진행해 달라는 회신을 보냈다. 전혀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로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제대로 닦지 않았을 때와 같이 뒤가 계속 가려웠고 찝찝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가장 대표적인 답안으로는 표지 디자인을 완전히 갈아엎고 새로운 디자인을 잡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으나, 어느 수준까지의 요청이 용납되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그냥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담당자에 문의해도 답변은 두리뭉실했기에).


남편과 친구들에게 시안을 보여줘도 한결같은 답이 돌아왔다. '별로'라는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이따금씩 따끔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괜찮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출간 소식이 분명 있을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였고, 평범했던 이전의 일상을 살아내야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날 무렵, 출판사에서 함께 미팅을 진행했던 사업부 이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미팅을 마치고 받아 온 명함을 보며 휴대폰 번호를 저장해 둔 덕에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동안의 서운했던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기에 더욱 밝게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짧은 인사가 오가고 난 후에야 이사님이 전화를 건 목적을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업무가 너무 바빠 작가님의 출판 과정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제 표지 디자인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작가님이 그런 일러스트를 결정했을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담당 디자이너는 작가님이 오케이를 하셨다고 해서요.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하여 전화드렸습니다."


공깃밥보다 눈칫밥을 더 많이 먹고 자란 덕에 키워진 눈치와 센스는 나의 가장 큰 강점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덕분에 신입사원 시절부터 선배들의 예쁨을 한 몸에 받으며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들과도 마찰이 생긴다거나 갈등으로 인해 문제를 야기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일까 이사님이 어떤 말을 하고자 했는지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나처럼 이사님도 표지 일러스트에서 뭔가의 아쉬움을 느꼈던 것일 터였다. 그래서 나의 생각이 궁금하여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이사님,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솔직히 디자인이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아요. 그래서 재차 구체적인 요청사항을 기재하여 드렸는데, 이게 전혀 반영이 되지 않아서 그냥 포기해 버린 것 같아요."


정작 중요한 일을 챙겨야 한다는 핑계로 속단하는 일, 지레짐작하여 후회를 만들고 키우는 일은 과거 내가 자주 써먹었던 나만의 생존 방식이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 넘겨짚고 예견하는 일 말이다. 부딪치기보다는 피하는 것을 주로 선택하곤 했다. 돌아올 따갑고 아픈 말들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던 바보 같고 모지리 같던 과거의 경험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이런 나로 인해 모두가 힘든 상황에 처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나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 밀려 들어왔다. 디자이너는 일러스트를 처음부터 다시 그려가야 할 테고, 인쇄/제작/마케팅 일정은 그에 따라 하나씩 뒤로 밀려날 테고, 나와 함께 공모전에 당선된 2명의 작가들 출간 일정 또한 딜레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돌아온 이사님의 대답은 역시나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질 않았다.


"제가 촘촘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작가님께서 원하는 사항들을 구체적으로 적어서 메일로 다시 주시면 이번에는 반드시 모든 사항들을 잘 반영한 시안으로 전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전 일러스트는 버리고 새로 그리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의 첫 에세이 표지 시안은 다시 태어났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말이다. 받은 시안들에서 직접 누끼를 따서 색감도 바꿔가며 이리 올려보고, 저리 올려보기도 했고, 표지 문구와 크기 등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디자이너에게 솔직히 전달했다. 빙빙 돌려가며 표현하는 대신, 보다 직설적으로 말이다. 그 덕에 꽤 만족스러운 시안을 받았고 결국 난 그것을 셀렉할 수 있었다. 책 출간 프로세스 중, 지금의 이 과정이 가장 정성과 열정을 다했던 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 와중에 나를 돌아보며 발견하고, 잘못된 것을 깨달아 반성하고, 나은 방법을 실행해 갈 수 있었던 경험들이 참 소중하게도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출간의 과정을 통해 또 한 번 성장할 수 있었다. 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바꾸는 감사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던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