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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서린 통유리 창문을 앞에 두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주말 아침의 모습. 우아한 몸짓의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미리 맡아 놓은 자리로 가고 있다. 그녀가 입은 빨간 코듀로이 바지는 밑단이 땅에 살짝 끌릴 만큼 길어 멋스럽다.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풍성한 숱의 파마머리, 어깨선이 축 처진 니트. 나무 바닥과 커피 내음과 무척 잘 어울린다. (쉬운 천국, 유지혜 / 94쪽)
빨간 코듀로이 바지, 그리고 그 뒤로 쭉 나열되어 있는 런던에 사는 어느 할머니의 생김새. 몇 시간 전 자라에서 주문한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컬러의 니트들이 떠올랐다. 아까 동생이 끓여 놓은 소고기 야채죽을 먹으러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자라에서 세일 중인 오렌지와 올리브 컬러 니트를 담은 장바구니를 바라보며 이것들을 살지 말지 고민했었다. 무채색을 띠는 옷을 줄곧 입어왔으니 참으로 깊게 고려해볼 만도 하다.
외국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의 분위기를 닮고 싶어 했으면서 막상 무채색 세계에서 발을 빼내려니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 니트들을 구매한다 하여도 찰나의 충동심으로 끝날지 혹은 십여 년이 지나도 애정이 가는 옷으로 남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한 옷들을 입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 뒤로 내보낸다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결심을 하고 두근거리며 결제를 했다. 하- 언제쯤이면 알록달록한 옷들을 아무 주저 없이 즐겨 입게 될 수 있을까? 무엇이든 처음이 가장 떨리는 것처럼 이러한 떨림들이 쌓이고 쌓여 다음번에는 마음에 들면 바로 주문하는 일사천리 마인드로 천천히 탈바꿈하길 바란다. 뚫어져라 제품 사진만 바라보고 있으면 나에게 남는 건 품절 안내 메시지밖에 없더라. 좋아하는 마음이 확실하다면 때로는 직진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물론 쇼핑할 때를 말하는 것이니 오해는 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