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 아닌 사랑
"어쩔 수 없었어."
과거 무언가를 선택할 때 스스로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를 위해서건 타인을 위해서건 이건 맞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합리화를 하며.
정말 그랬을까. 지금 와 돌아본 나의 많은 선택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러면 사랑받을 거 같아. 이러면 좀 괜찮아 보일 거 같아. 이러면 인정받을 거 같아. 이런 잠재의식의 소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은 얼마나 되었을까. 그땐 몰랐는데 의외로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내가 그걸 아득바득 고집하지 않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을 거다. 그 세상은 무너지더라도 다른 세상이 있었겠지.
두려움으로 한 선택은 보통 그걸 지속할 힘이 오래가지 않는다. 두려움이라고 해서 강제로 덜덜 떨면서 하는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사회 통념이나 나의 환경에서 형성된 오랜 신념에서 오는 모든 선택들을 말한다. 집단 무의식의 영향도 포함한다. 그게 맞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들.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게 안 되면 나는 가치 없다, 실패했다, 혹은 옳지 않다고 규정하는 길들. 과거 내가 안전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한 것들에서 의외로 난 내 안의 힘을 보았던 경우가 많다. 이건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선택한 것일 거다.
어떤 이는 이걸 원체 깔고 태어난 소프트웨어라고 표현하던데 그걸 인식하는 순간, 자신의 한계도 알게 된다고 한다. 리밋 값은 자신이 설정했다는 걸. 나한테 뭐가 깔려있는지조차 인식이 안 되는데 리밋 값이 애당초 설정된 그 프로그램으로 뭘 해보려고 하니 그 이상이 될 턱이 있나면서. 일리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누구나 원하는 돈, 그거 먹고 살만큼만 있으면 된다와 내가 진심으로 기쁜 것들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돈, 그 의식 사이의 갭이 생각보다 꽤 큰 것처럼.
사랑으로 선택하는 건, 나를 진심으로 존중해서 선택하는 것들이다. 의식적으로 그런 선택을 해본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선택들은 어쩌면 타인의 삶도 진심으로 존중하는 것과 연결될 가능성이 많다. 그게 진짜 나 자신을 존중해서 한 선택이라면.
내 경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코로나 전 외국을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던 시절 난 한동안 채식을 했다. 고기를 그렇게 먹어대던 니가 갑자기 왜.라고 한다면 순전히 그때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친구들의 효과라 할 수 있다.
우연인지 어쩐지 당시 내가 만나는 거의 대부분의 외국 친구들은 채식을 하고 있었고 비건인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꿋꿋이 한 켠에서 고기를 우적우적 먹는 내가 돌연 잔인한 도축업자가 된 것 같기도 해 가끔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다 환경도 생각하고 동물들도 생각하면 나도 동참해야 의식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분에 채식주의를 선언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채식을 하고 몸이 더 가벼워지고 건강한 느낌이 들었고 내 몸 상태에 만족감을 가졌으나 언제고 맛있는 고기가 나타나면 아. 먹고 싶다. 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서 나의 채식주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기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유별난 느낌이 들었고 내가 어쩌다 기운이 없으면 니가 고기를 안 먹어서 그런다고 주변인들은 걱정을 했다. 거기에 채식을 하면서 어째 더 예민하고 자신을 치열하게 통제하는 듯한 아주 일부 사람들을 보며 나는 그러느니 고기를 먹겠다고 혼자 다시 선언했더랬다.
그런데 요 근래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다시 내 주변에 다가온다. 좀 다른 건 내가 동물들과 교감이 늘어나고 축사에 오로지 먹히기 위해 갇힌 동물들의 이미지가 더 떠오르는 시점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갑자기 식욕이 폭발했던 근래에 고기고 뭐고 많이 먹다가 위가 탈이 나면서 한동안 아팠던 시점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고 보면 과거 난 갇힌 동물의 꿈을 몇 번 꾼 적도 있는데 그걸 글에 풀어서 쓰기도 했다.
터무니없이 좁은 공간에 젖소들이 칸칸이 들어가 갇혀 있었다. 그 공간은 실제 축사가 아니라 일부러 고통을 주려고 누군가가 고안해 낸 형틀처럼 보였는데 고개를 기웃할 수조차 없는 그곳에서 소들은 류아를 향해 큰 눈을 천천히 껌뻑였다. 거기서 눈을 껌뻑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싶었다. 어디서 들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뱃속을 울리는 거 같은 아주 낮은 주파수의 소리가 불편하게 웅웅거렸다. 볼품없이 늘어진 소젖에는 착유기가 단단히 달려 있고 그것과 바로 연결된 호스는 투명한 붉은 셀로판지가 한 겹 쌓인 것 같았는데 그 안으로 우유가 지나는 것이 보였다. 호스 색깔 때문인지 소의 몸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아 몸이 괜히 찌릿했다. <소설, 푸른 꽃의 춤 중>
예전에 선조들은 그래도 먹을 만큼만? 그때그때 먹었을지 모르나 요즘은 터무니 없는 과잉 소비로 단지 '먹기 위해 길러지는 생명'이 있다는 것이(그것도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새삼 너무 잔인하게 다가온다. 고통스럽게 죽은 동물들의 에너지는 그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그래서 그것이 과연 우리 몸을 살릴 수 있을까라던 몇 년 전 친구의 말이 요즘 더 크게 내 안에서 울린다.
마무리된 나의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자신이 만나는 모든 이가 나였구나. 를 느낀다. 그리고 그 안에 함께 등장한 고양이도 마지막에 어쩐지 비슷한 말을 던진다. "네가 나였구나."
두려움이 아닌 사랑으로 선택한 것은 뭐가 됐든 삶에서 지속성을 가질 수 있을 거다. 내 안에서 이미 합의가 되었는데 부차적인 이유 따위가 뭐가 필요하겠나.
다음 달 오랜만에 출국을 한다. 이번 여정은 소설에서 내가 썼던 것들을 모두 가슴으로 느끼고 오는 순간들이길, 연결된 섬 프로젝트로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길. 그렇게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