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집
갇힌 느낌
환경이 나를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느낌을 가졌을까.
내 근육을 여기선 제대로 써 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내가 열심히 쓴다고 썼던 그 근육은
보이기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서울이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싫었던 거다.
자주 우울했다.
상대가 주는 위안, 인정과 사랑에도 허전했다.
내가 지나간 그 모든 자리에
의미 없는 색들이 얼룩덜룩 남았다.
밖에서 색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마치 남의 그림 보듯
시간이 좀 지나니
내가 밉게 칠한 색도 괜찮다.
나쁘다 좋다 붙인 이름이 희미해진다.
상대의 눈에도 들어있는 그걸
아주 똑바로 보면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나의 색을 봐 달라고.
그러니 얼룩덜룩,
필요했다.
잘못된 색은 하나도 없다.
서울,
이번에 만난 그 얼굴은 하얀 종이였다.
백지인 서울은
나의 스무 살, 별일 아닌 일에 가슴이 뛰던 빠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때 빠리는 드디어 내 근육을 쓰는 느낌이었다.
나도 근육이 있구나.
내가 좋아해서 선택한 그건
움직이는 느낌을 주었다.
하와이 다녀와서 단편을 썼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거기서 난 처음 만난 빠리의 얼굴을 주체적 우울이라고 불렀다.
우울해도 주체적으로 우울하면 신이 난다.
제대로 움직이게 한다.
백지를 채운다.
좀 더 나 같은 거로.
아주 처음 내게 근육이 있는지 알려줬는데
다시 가면 고맙다고 하고 싶다.
그런데
좋아하는 움직임의 방식을 찾고 나니
다시 만난 곳들은 같은 백지다.
뭐든 그려도 되는.
어딜 가도 빠리다.
우울은 내가 나를 잃어버렸을 때 오는 감정이다.
내가 나에게 가장 자연스러울 때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는 고마운 친구다.
나를 쓰게 해 준 생명의 은인이다.
가끔 또 와도 반갑게 안아줄 수 있다.
그림 속 그림 속 그림
내가 살던 동네,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갔다.
거기 공원이 하나 있다.
파리공원
성당과 절 사이에 있는 그 공원에는 에펠탑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게
구석에 쬐그만하게 있었다.
나는 인생이 심각해지면 파리공원을 가로질러 성당으로 뛰쳐들어갔다.
학창 시절도, 성인이 된 이후도 비슷했다.
들어갔다 나오면 자주 더 심각해졌다.
가면을 요리조리 돌려 얼굴에 맞춰 더 잘 쓸 수 있게는 되는데
내가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그 옆에 절에도 가본다.
그냥 공원에서 더 뛰어놀았을걸.
나는 왜 갇혔다고 생각했을까.
이번에 다시 가서 본 파리공원에 큰 에펠탑이 서 있었다.
새로 만든 에펠탑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보인다.
주로 말라 있던 분수 자리에 물이 넘치고
아이들이 뛰어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