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섬의 기억_무명 4

Cuba 쿠바 (2)

by Iris K HYUN



무명(無名) 4

Cuba 쿠바




기억을 잃고 나서 무명 4는 삶의 의미마저 사라진 기분이다.

타인의 기억 속 그녀는 이런저런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것들은 끔찍이도 싫어한다고 했다. 정작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매번 주제는 다르지만 자신의 눈으로 본 무명 4를 들려주었다. 그 눈은 무명 4가 예측하지 못하는 미래마저 보는 듯했다.

무명 4가 자신이 누군지 찾아낼 거라고 말했을 때 그건 소득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들은 여자의 눈에서 무얼 보고 있는 걸까.


유튜브에 업데이트된 추천 영상을 훑었다. 계정이 있는 SNS마다 자동으로 뜨는 게시물을 본다. 그 알고리즘은 무명 4보다 무명 4를 더 잘 안다며 자신감 있게 하나씩 툭툭 던져준다. 여자의 과거 머릿속 지도. 익숙한 걸까. 좋아하는 걸까.



무얼 진정으로 즐길 수 있었는지. 그런 기억이 사라진 것이 무슨 몹쓸 저주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이곳 쿠바에서 며칠이 지나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기억이 없으니 오히려 뭐든 편견 없이 느껴볼 수 있는 거 아닌가 하고.

무명 4는 예쁘게 반짝이던 푸른 눈을 만나겠다고 그리고 그 눈을 고양이에게 전하겠다고 결심했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투명한 푸른 눈이라니. 이곳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눈이었다.

결심을 하고 나자 모든 것이 단순해졌고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기억은 아니고 어떤 이름 모를 남자의 기억이었다. 요상도 하지. 그 남자도 푸른 눈에게 춤을 배우러 갔었다.









와우. 세상에. 이게 누구야.


약속을 해서 올 줄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소란스러운 환영은 아마 닉이기에 가능할 것 같다. 볼 인사에 격한 포옹까지 하며 펄쩍 뛰는 닉을 보며 웃음이 난다.


그냥 맛보기로 조금 배워보고 싶어서 왔어요. 오늘 하루 배운다고 잘 되진 않겠지만요.


굿굿, 잘 왔어요. 조금이라도 배운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크죠. 쿠바에서 바로 나, 닉에게서 살사를 시작했으니 당신은 앞으로 어딜 가도 계속하게 될 거예요. 굿 초이스. 베리 굿.


이 자신감은 대체 뭔가 싶지만 특유의 과장도 슬슬 재밌다.


자, 살사라는 건 남녀가 함께 만들어 내는 춤이죠. 그러니 첫째도 매너, 둘째도 매너, 마지막도 매너입니다. 못해도 잘해도 매너가 기본이에요. 알겠어요? 괜히 여자가 맘에 든다고 춤으로 찝쩍거리면 안 된다 이겁니다.


찝쩍거릴 형편도 아닙니다. 선생님.


그렇죠. 그러나 잘해도 계속 그렇게 겸손해야 합니다. 절대 자만하면 안 되고요.


그는 박수를 한번 촥 치며 다시 말한다.


자, 춤은 우리 몸에 이미 다 내재되어 있습니다. 못 추는 것이 아니라 못 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을 뿐입니다.


말을 할 때도 춤을 추듯 저렇게나 팔을 휘둘러 가며 설명하는 선생의 열정에 보답하고자 고개라도 열심히 끄덕인다.


자, 그리고 살사는 남자가 리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처음 며칠 배우고 여자분에게 가서 춤을 신청하기가 좀 힘들어요. 모르죠. 아주 뻔뻔한 사람은 가능할지도요. 어어 제발.. 벌써 그렇게 포기하려는 표정 짓지 마요.


아 제가 과연 신청할 수 있을까요.


어제 바에서 보았던 사람들이 떠올라 그만 자신감이 확 없어졌다.


안 될 건 없죠. 단 베이직 스텝만 밟으면서 손을 내미는 건, 마치 뭐랄까. 여자 친구를 뷔페에 데려가 놓고 끊임없이 샐러드만 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뭐 처음부터 같이 샐러드만 먹고 싶었으면 괜찮겠죠. 그러나 기대 수준이 다르면 어떨까요? 당연히 힘들겠죠. 그런데 이거 다 과정이에요. 슬퍼하지 말아요. 자, 닉과 함께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죠.


대체 언제 시작하는 것인가. 서론이 너무 길다. 고 생각할 즈음 푸르스름한 문에 달린 기다란 차임이 청명하게 챙-하고 울린다. 형광 연둣빛 레깅스를 입은 육감적인 쿠바 여인이 들어온다. 닉이 여자를 반기며 말한다.

오늘 우릴 도와줄 스페셜 파트너예요. 인사해요. 이쪽은 피비, 이쪽은 윤.



한참 동안 우린 베이직 스텝만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기본기가 아무리 없다지만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쯤은 금방 넘어가도 되는 것이 아닌가. 좀 지루했고 정직한 자세로 온 힘을 다했던 조금 전과 다르게 약간 건방진 표정이 되어 설렁설렁 움직였다. 언제 춤이란 걸 출 수 있을까. 몇 번 배우지도 못하는데 이거만 하다가 끝나겠네. 이런 생각들이 끝도 없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닉이 아주 크게 박수를 착- 친다.


자 홀딩 해봐요. 천천히 베이직을 밟아 보는 겁니다. 원, 투, 쓰리, 파이브, 씩스, 세븐~


드디어 내 앞에 피비가 섰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사진만 씁니다.

<커버 사진의 제목은 이브와 아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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