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섬의 기억_고양이의 꿈 7

하얀 방 White Room (1)

by Iris K 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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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의 꿈 7 <

하얀 방 White Room


하얀 방이야. 여기엔 검은 고양이만 있는 게 아니야. 한 아이가 자신의 몸보다도 큰 책을 펼쳐 들고 있어. 그림만 보는 건지도 몰라. 어느 날 꿈에서 본 아이야. 소젖에 연결된 호스로 피처럼 붉게 보이는 우유를 받아먹고 있던 아이 말이야. 푸른 눈. 아이는 그때랑은 다르게 사방으로 제멋대로 삐쭉삐쭉 솟은 우스꽝스럽지만 귀여운 머리를 하고 어깨 부분이 셔링 처리된 연한 연둣빛 나시 점프슈트를 입었어.


머리 스타일 멋지네.


내가 먼저 말을 걸었어. 아이는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너로구나 하는 얼굴로 옅게 웃어. 머리칼과 피부에서 아주 익숙한 향이 나. 고목 사이로 예고 없이 샤샤-삭 불어온 바람처럼 청량한데 달콤한 듯 고소한. 꿀 바른 오트밀을 아주 오랫동안 꼭꼭 씹고 있다가 방금 내린 커피를 한 모금했을 때 같아.


혼자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이에게 물으며 주변을 빙 둘러봤어. 그야말로 텅 비었어. 도대체 허옇기만 한 이 방은 무얼 위해 만들어진 건지, 나는 왜 여기 있는지, 이 아이는 또 왜 여기 함께 있는지,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정작 입으로 말은 더 나오지 않았어. 아이는 커다란 하얀 초에 불을 붙여. 1.5리터 생수병 정도나 되는 크기야. 방이 원체 하얘서 초가 거기 있는지도 몰랐어. 통통하고 자그마한 손으로 야무지게 성냥을 켜는데 많이 해본 듯한 솜씨야. 이렇게 밝은데 초는 뭣 하러 켜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어. 게다가 골동품처럼 보이는 기름 등잔이 들어온 문 앞에 줄지어 조르륵 놓여 있어. 기름이 없는 건지 전부 꺼져있는데 어쩌면 내 등장에 꺼진 지도 몰라. 어느 쪽이 되었든 미안했어.


아이가 보는 책은 여기서 가장 어색한 얼룩 같아. 내게 말없이 건네줬어, 그 얼룩. 만지면 먼지가 폴폴 날릴 것 같은 푸르스름한 표지의 그건 세계 곳곳을 담은 사진첩인가 봐. 휘리릭 대강 넘겨보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다 가본 장소들인 거야. 반가워서 아는 척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니 마침 모르는 곳이 하나 나오더라고. 하늘 같은 호수를 배경으로 공중 그네를 타는 사람들, 사진 아래에 간략한 설명이 있어.


그뢰나 룬드,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공원,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마법의 세계. 나이 든 이들은 젊어지고, 꼬마들은 커지고, 위는 아래가 되고 아래는 위가 되는 곳.


와, 여기 어디야. 혼자 기분이 들떠서 중얼거려도 아이는 대꾸도 않고 물끄러미 나를 관찰하듯 보기만 해.


말을 못 하나?


답답하리만큼 오래 침묵하던 아이는 앙증맞은 손가락을 펴서 한쪽을 가리켜. 거긴 커다란 문이 하나 있어. 그마저도 온통 하얀색이라 금색 메탈 문고리가 앞으로 삐쭉 솟아있지 않았다면 그게 문인지 구분도 안 되었을 거야. 진짜 금덩어리는 아니겠지. 영롱하게 빛나는 그 기이한 구획을 눈으로 만지듯 따르다가 앞으로 갔어.


뭘 망설이는 거야?


아이가 내게 말을 해. 드디어.


응?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구나 안도한 마음 반, 두려운 마음 반으로 아이를 봤어.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야.


왜 못 나가고 있냐고.


............ 밖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왜 나가라고 하는 거야?


나는 나가라고 한 적은 없는데?


아이는 어깨를 으쓱해. 얄밉게. 그리고는 속삭이듯 은밀하게 말했어.


뭐 하나 알려 줄까? 밖으로 나가면 엄청 달콤한 열매들이 열려 있을 거야.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끝도 없지. 맘만 먹으면 아주 쉽게 언제든 먹을 수 있어. 나가기만 하면 그 열매는 다 니꺼라고.


아이는 ‘아주 쉽게’라는 말에 힘을 주었어.


뭐야, 이거 거의 나가라고 종용하는 수준이잖아?


갑자기 의심이 확 몰려왔어. 아이가 사탄의 아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려워졌어.


종용? 나 그렇게 어려운 단어는 몰라. 그냥 그렇다고 말해 주는 거야. 넌 마르지 않는 풍요의 바다를 산책하게 될 거라고.


종용은 모르면서 이 쪼그만 녀석이 풍요는 안다고 입을 오물거리고 있어. 들쭉날쭉한 아이의 어휘 구사력에 난 그냥 이 상황을 판단하길 포기했어. 뭐 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어쩐지 아 이거 꿈이구나. 잠깐 잊고 있었네.


문고리를 다시 잡았어. 두려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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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모든 사진은 제가 어디선가 찍었던 것만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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