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했다. 모닥불 곁에 둘러앉아 도자기 반죽을 주물럭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짐승의 가죽이라도 그대로 벗겨 둘러 입은 듯한 옷차림이다. 장작을 잔뜩 삼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불, 그 연기 사이로 나무의 잎새가 바다의 잔물결처럼 흔들린다. 보이지 않는 새의 소리가 물결보다 더 간지럽게 그의 얼굴을 지나니 남자의 눈이 보였다. 본 적이 없는 바다의 색이다. 어디서 봤더라. 가끔 사람 눈에서 바다에 이런 색이 있었다는 걸 새삼 기억하기도 한다. 기억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거듭 주장하는 여자가 뭐 그렇게까지 미친 게 아닐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이곳에서는 이 여자만 기억이 있나 보다. 사람들의 눈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들은 여자가 언젠가 본 것들 안에서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선명해진다. 푸른 눈 곁에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자신의 이름도 모르는 남자는 베이, 플로우, 이 두 단어를 중얼거렸다. 어색한 빛을 담은 그 눈은 여자를 비추어 부끄럽게 했다. 단어의 뜻을 몰라서는 아니다. 허공을 바라보는 그 눈에 여자가 들어있다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슬픈 것이다. 여자는 얼굴을 세차게 한번 문지르고 호흡을 가다듬고 흙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현 炫
수차례 두드리고 흙을 거듭 묻혀 반죽한 그 도자기에는 이름이 없다. 제대로 열을 받지 못한 도자기는 깨져서 쓰임을 찾지 못한 채 굴러다니는 것들과 비슷한 운명이다. 굴러다니는 것들은 소리를 내지만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고 다 버려지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자신을 다시 빚기도 한다. 푸른 눈 남자는 갈색 눈의 여자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수백 번도 더 들었을 그 이름을 그는 끝내 쓰지 못했다. 구워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아이들 사이에서 연신 담배만 피워 올린다.
혀언.
여자는 입을 좀 더 크게 벌려 천천히 소리를 내보았다.
히온? 여언?
푸른 눈은 멋쩍게 웃었다. 바닥에 쓰인 그 글자를 정확히 읽는 건 이번 생애에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은 한숨을 인내하듯 천천히 뱉었다.
뜻이 뭐예요?
밝게 빛난다는 뜻이에요. 불과 검은색이 합쳐졌어요.
푸른 눈이 밤바다를 가로지르는 달빛처럼 일렁인다.
멋진 이름이네요... 빛나다.... 그런데 검은색은 어디 있나요?
모닥불의 재가 별안간 여자 쪽으로 튀었다. 연기의 매캐한 냄새와 그을음을 한바탕 뒤집어쓴 여자의 얼굴이 더 이상 허옇지 않을 거란 사실은 거울을 안 봐도 알겠다. 여자는 웃음을 터트린다. 쏟아진 찻잔을 돌려놓는 그의 손은 원시 수렵 생활이라도 한 듯 거칠어 보인다. 손톱 사이에 흙을 떼어내며 어디에도 속한 적 없는 아이처럼 웃었다. 멀리서 들리는 핸드팬 소리가 눈 안에서 흐르는 것처럼 황홀하다. 그 눈은 옆에 앉은 다른 푸른 눈에게 여자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여긴 빛나다. 현. 저기 밤하늘에 달이야.
치앙다오의 한 사원, 검은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 얼굴을 세차게 비비고 신문을 덮었다. 2567년, 불력으로 쓰인 그해는 2024년이다. 꿈을 꾼 것인지 신문을 읽은 것인지 계속 들리는 스님의 노래인지 모르겠다. 붉은 달이 떠 있는 밤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갇혔다.
내가 만든 이야기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건 그걸 없애는 거다.
붙인 이름을 떼어내고 보는 세상은
완벽하다.
옳고 그른 것
좋고 싫은 것
아름답고 추한 것
그 기억이 사라졌다.
다시 시작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다시 눈을 뜬 고양이는 한 소년을 보았다. 강가 한가운데 어느 돌부리 위에 올라서 있는 아이는 노래를 한다. 떠오르는 것인지 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배경이 되는 커다란 나무 사이에 걸친 해, 거기서 나오는 빛이 실체가 있는 먼지처럼 강 위로 내렸다. 아이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다. 햇살을 덮은 보오얀 막 속에 어른거린다. 아이의 소리는 어떤 것일까. 그 질문을 하니 아주 오래된 나무가 흔들거리고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강물 소리가 귀를 울린다. 아이는 노래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