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yun Jun 26. 2024

목성에 사는 전갈 (2)


목성에 사는 전갈 (1)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그런데 다들 왜 눈을 감고 있어?



그가 작업한 거의 모든 그림 속 여자들은 눈을 감고 있다. 아니면 뒷모습이나 눈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빛의 명암만 구분하는 줄 알았는데 형태도 보는구나. 



그는 눈을 그리게 되면 집중점이 눈으로 가니 몸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그림이 살지 않는다고 했다. 몸을 제대로 담고 싶은 거 아니냐고 묻는다. 전갈은 집게발을 들어 그가 준 녹차를 급하게 들이켰다. 한 여름 약수터에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듯 연거푸 몇 차례를 비웠고 그는 빈 잔을 계속 채워주었다. 



자세가 어떻든 나는 눈을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싶어.



전갈의 단호함에 알겠다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이 맞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제껏 몸을 그려달라고 온 사람에게 눈을 그려준 경험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여행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도 전갈도 참 여기저기 다녔다. 이전 생애 집시나 김삿갓이나 뭐 그런 거였나 보다. 그런데 재밌는 건 공간이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 그 많은 지역들 중 하나쯤은 겹칠 만도 한데 겹치는 것이 없다. 난 이곳에 왜 온 거지? 그림 안에 그림 안에 그림 같다.  



근데.. 저어기 저 그림 속 여자는 누구야? 



벽에 붙어 있는 그림 속 인물들을 다 파헤칠 작정인지 전갈은 집게발을 들어 의욕적으로 여기저기를 가리킨다. 벽에 붙어 있는 인물 중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는 여자를 물었다. 



쿠바에서 왔어. 노래를 하는데.. 바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인데... 잠시만.. 앨범 들려줄게.



전갈이 하마처럼 차를 마시는 통에 다시 물을 끓이느라 바쁜 남자가 말했다. 

나른하지만 여유 있는 공간을 끝도 없이 만드는 힘이다, 여자의 목소리. 그 색이 삽시간에 전갈을 쿠바로 데려간다. 시간이 다른 방식으로 흐르는 곳, 모두가 옷을 벗고 있어 옷을 벗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 곳, 수채화가 아니라 채도 높은 원색이 예고 없이 튀어 오르고 섞인다. 태양을 마주 본 것처럼 눈이 시리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의 노래는 의외로 감미롭다. 다층적 시차가 존재하는 그건, 매 순간 새롭게 중첩되는 기억이다. 전갈은 그 시간에 잠시 머물렀다. 



몸이 완전히 잠겨도 될 만큼 푹신하다. 침대처럼 크고 하얀 쿠션, 그 위에 누웠다. 제법 긴 여행을 했는지 머리 위 창에서 들어오는 빛도 사라진 지 오래다. 스탠드 핀 조명 두 개가 다정하다. 발 밑에서 올라오는 히터 바람은 나신의 부끄러움을 대신 노래하는 것 같다. 피부처럼 두르고 있던 숄을 내려놓고 그가 단단하게 들고 있는 거울 속 자신을 본다. 


저게 나라고?


그의 제안에 따라 몸을 움직여보면서도 머리는 끝도 없이 말한다.


이쪽 살은 저리로 가야 해. 저쪽 살은 이리로.  



그의 최종 제안대로 눈을 감고 비스듬하게 누워있기로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거울을 들어 전갈을 비추며 세심하게 의중을 살피지만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속이 편할 듯하다. 그는 전갈이 선택한 검은색으로 잠자는 듯 죽은 듯 누워있는 여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 몇 분은 눈을 반쯤 뜨고 그를 힐끗힐끗 보았다. 그는 아주 집중한 얼굴이다. 전갈의 머리는 쿠바 여인의 나른한 목소리를 연출하고 있는데 몸은 야트마한 언덕배기에서 보초를 서는 미어캣이다. 시간이 좀 지났다. 눈을 감고 있으니 따뜻한 히터 바람 덕인지 어이없게도 잠까지 온다. 잠깐 졸았는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르는 남의 집에 와서 옷을 벗고 누웠다는 생각만 없으면 몸은 그야말로 참 편하다. 20분 그리고 잠깐 쉬었다가 다시 20분을 그리기로 했던 애초에 계획과 다르게 그는 그냥 죽 이어 그렸다. 사실 쉬는 시간은 모델을 위한 것이다. 같은 자세를 계속하는 것은 힘드니까. 그러나 전갈은 이 포즈를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안정감을 느꼈고 어느덧 세타파 상태에 이르렀다. 공기 중에서 알파와 세타가 만났다. 




우리 엄마는 가슴이 커서 달리기 할 때마다 힘들었대.

우리 엄마의 엄마도 그랬고.

대대로 가슴이 큰 유전자를 가졌는데

그래서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기도를 했대. 

내 딸은 가슴이 가벼워서 달리기도 잘하고 씩씩했으면 좋겠다고.

왜 그런 쓸데없는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어.

달리기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하여간 엄마의 그 간절한 바람이 신의 마음을 움직였나 봐.

그건 유전자의 질서를 거스를 만큼 진실된 바람이었을까.

엄마는 나를 보며 흡족해하셨어. 

요즘 세대의 몸이다라면서.. 

나는 엄마가 일부러 가슴을 압박해서 다니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어.

예쁜 속옷도 그냥 입는 법이 없이 엄마가 손수 고쳐 입었어.

왜 일부러 가슴을 괴롭히는지 숨을 못 쉬게 만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나는 풍만한 비너스나 그런 여자들이 되고 싶은데..

심지어 나는 달리기도 잘 못했어. 

눈앞에 비너스가 있었지만

비너스는 자신의 몸을 좋아하지 않았어. 




그가 그린 그림은 생각보다 맘에 들었다. 그래 눈을 감길 잘했어.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런데 그는 내게 숄을 가져다주면서 말한다.



눈을 뜬 그림도 그려줄게.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베리티 작가님 소설 속에서 들었던 Nina Simone 버전의 Lilac Wine을 첨부해 봅니다. 문득 떠올랐어요, 제가 들은 쿠바 여인의 목소리 대신이에요.  


https://youtu.be/LT38CIgRse4?si=sjzF0C56iObXI5_m







커버사진; Toulouse, 화가의 집, 2023. 가을


이전 06화 목성에 사는 전갈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