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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un Jun 30. 2024

목성에 사는 전갈 (3)

목성에 사는 전갈 (2)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눈을 뜬 그림도 그려줄게.  



눈을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싶다는 전갈의 바람이 못내 마음에 걸렸나 보다. 두 번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푸른색을 선택했다.


머리와 어깨 쪽에 쿠션을 더 높게 받치고 정면으로 향하게 누워 팔을 들어 머리 위에서 교차했다. 전갈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두고 독침쏘듯 치명적인 눈빛을 마구 보냈다.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처럼 뇌쇄적이면서도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그런 여자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반복적으로 그렸다.



잠깐 쉬고 가자. 와서 한번 봐봐. 네 마음에 들 거야.


20분 그리고 중간에 보여준 미완성작엔 다리만 있다. 표정을 그렇게 열심히 짓고 있었는데. 아직 얼굴로 올라가지도 않았다. 그는 전갈을 멋지게 그려주려고 노력한 것 같았다. 당당하고 힘차게 쭉 뻗은 다리의 형태를 보며 전갈은 흐뭇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얼굴까지 다 나오면 유디트 뺨을 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기대감에 몸이 떨렸다.



그런데 완성된 그림을 보고 전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그려진 여자는 아름답기는커녕 거만해 보였다. 약간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뇌쇄적인 것이 아니라 나 당당하지라고 세뇌시키는 느낌이다. 전갈의 손에는 조국을 침략한 적장의 머리가 들려있다. 자세히 보니 그 머리는 전갈의 머리와 닮았다.   


맘에 들지 않아? 좋아할 거 같았는데...


그는 전갈의 표정을 보고 좀 당황한 듯했다.




다음 날 전갈은 전갈을 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울리는 그의 메시지는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러웠다. 왓츠앱을 열었다가 그냥 닫았다가 다시 열였다.

 

이 메시지는 삭제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반복된 메시지 없는 메시지 뒤에 고심한 듯 쓰인 한 문장이 어색하다.


네가 괜찮다면 너를 그릴 기회를 한 번 더 줄 수 있을까?



그를 처음 본 날 옷을 벗는다는 부담감으로 전갈은 음식을 거의 못 먹었다. 프로모델도 아니지만 정신 만은 프로로 임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니 하는 마음이니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몸을 남기고 싶었다. 그런 전갈이 무슨 심산인지 쌀국숫집에 들러 국물까지 다 들이켰다. 그의 집에 가는 길, 임산부처럼 불러진 몸통에 전갈의 갑옷이 터지려고 한다.


그는 붉은색을 선택했다. 그가 선택했지만 전갈에게 결정권을 주었다 해도 같았을 거다. 푸른색, 검은색을 했으니 다른 하나는 붉은색의 느낌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마 이번엔 네 마음에 들 거야.


그는 두 번째 그림을 그릴 때처럼 말했다. 전갈의 욕망을 최대한 반영한 지난 그림이 정작 당사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붉은색을 고르고 필사의 전의를 불태운다. 연필을 깎고 있는 그의 자세가 어딘가 모르게 결연하다. 발 밑에 히터는 돌아가고 그는 그림을 그린다. 사실 전갈은 그의 눈을 보는 것이 황홀했다. 쉬지 않고 캔버스와 몸을 오가는 시선은 황홀함 이상이다. 시선을 받는 것을 싫어하던 전갈의 마음에 다른 색이 칠해졌다. 몰입한 예술가는 이토록 멋지구나. 그 시간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오늘 기분이 별로라서 이 정도밖에 못 그렸어. 이런 변명은 통하지 않아. 모델이 내 눈앞에 있다면 나는 이 시간을 완전히 책임져야 해.


그림이 잘 안 그려질 때는 어떻게 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순간순간 레이저 빔을 맞는 느낌이다. 황홀하다. 몇 번을 황홀한지 모르겠다. 그렇게 황홀한데 황홀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결과를 낳았다. 유디트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적장의 목을 자른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의 화를 못 이겨 목을 자른 캐릭터가 되었다. 마음에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러니 세 번째 캐릭터는 참수형에 처하도록 절대로 내려버두지 않겠다. 쌀국수가 채 소화되지 않은 배를 감싸 안으며 전갈은 단호하게 말한다.



있는 그대로 네 눈에 보이는 나를 그려줘.



 

첫 번째는 그가 추천하는 자세였다. 두 번째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고, 세 번 째는 가장 너와 나 다운 거였다.

붉은색으로 그려진 여자는 쿠션에 반쯤 몸이 잠겨서 한쪽 눈만 드러낸다. 자세도 두 번째보다 훨씬 편하다. 여자가 고개를 기울인 각도에 맞춰 그가 얼굴을 기울일 때 눈은 웃는다. 계속 웃고 있을 수는 없지만 나의 눈은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원래 내 얼굴이다.

 



붉은색 아이,

여자이기 전에

자신이 누군지 묻고 있는 아이

존재의 부끄러움을 희미하게

느끼기 시작한 아이,

여자가 웃는다.

 






일본 온천에 간 적이 있어

우리 밖에 없는 온천탕에서

엄마의 누드 사진을 찍어드렸어

엄마는 나의 비너스라고,

나는 엄마를 닮고 싶다고 했어

엄마는 아이처럼 웃으셨어

모르고 현상한 그 사진 무더기 속에

그 사진도 섞여있었어

엄마는 재밌다고 웃으셨어

 



너처럼 그런 예술가가 되고 싶어

어떤 모양이어도 상관없어

물고기 시절에 말이야

난 힐러가 되고 싶었어

세상을 다니며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거든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는, 깊이 이해하는,

그래서 몸에 병까지 낫게 하는

그런 물고기

그런데 말이야

그 모습에서 완전히 기쁜 나를 발견할 수가 없었어



나는 보았어

자신이 물고기인 줄 모르는

물고기

넌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나는 사라졌어

너의 눈에서

사라졌어

떠올랐어

순간의 그림

자유를 느꼈어

너는

그대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깊은 위안이야



목 잘린 남자가 부활했어

그가 나를 보며 웃어

그의 목이 붙었는데

내 목소리가 나와




펼치기. 끝.




좌. Paris/ 우. Toulouse 2023. 가을








이 글을 적다보니 툴루즈에 있을 때 만난 세실이 떠오르네요. 유명한 재즈 가수 클로드 누가로의 딸이기도 한데요. 그녀를 다시 만나면 눈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시 안 만나도 이미 만난 느낌이기도 하고요.






https://brunch.co.kr/@angegardien/369




클로드 누가로가 딸에게 써 준 곡, Cecile ma fille 들어봅니다.



https://youtu.be/43cxiHSOZd0?si=_fPQKHYbCWpunRVc






커버사진; Paris, 오랑쥬리 미술관, 2023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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