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바람과 빛
태풍이 지나간 자리, 요즘 읽고 쓰고 추며 잘 쉬고 있다.
가끔 우울함이 소나기처럼 찾아오고 무기력이 마른장마처럼 낮고 길게 머물기도 하지만 나를 말려주는 빛과 바람들 덕분에 매일 다시 뽀송해진다.
학원 문을 닫아서 이삿짐을 정리하는데 마지막으로 벽시계를 내리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귀여운 액세서리를 좋아했던 엄마가 학원 오픈 기념으로 사준 낙하산모양의 벽시계 아래로 시계추에 매달린 사람이 여전히 좌우를 똑딱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주르륵. 소나기처럼 내리는 눈물을 훔치고 시계를 내려 이삿짐 상자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 시계는 마지막까지 할머니의 좋은 수다친구가 되어 주었던 나의 둘째 아이 방 벽에 걸어두기로 한다.
가끔 아침에 청소를 하다 보면 왼쪽 가슴이 아플 때가 있다. 갑자기 피곤하거나 한 달에 한번 호르몬의 영향에 들 때 갑자기 그 통증이 수면 위로 올라오곤 한다. 이유 없이 불쑥 찾아온 통증은 그동안 있었는데 내가 모르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한동안 계속 지속된다. 동시에 막연한 불안과 우울함이 스멀스멀 나의 하루를 지배하려 든다.
그럴 때면 바로 곁에 있는 책을 집어 들거나 운동을 하러 간다. 함께 훌라를 추는 동료들이 불러내면 신나서 달려 나간다. 갑자기 찾아오는 비에 나도 모르게 젖으려 할 때 스스로 우산을 펼쳐 급한 불을 끄고, 아니 급한 물을 막는다. 그리고 그 후에 주변에서 내리쬐는 빛과 솔솔 불어 보내는 바람의 힘으로 축축함을 증발시킨다.
그림 속, 탱탱한 탄력이 느껴지는 빨간 우산이 퍽 마음에 든다. 제 할 일 다 했기에 우산 날개를 쫙 펴고 비스듬히 짝다리를 짚고 선 모습이 당당하다. 안 그래도 지저분했던 단화는 마침 빗물 덕분에 뽀얀 얼굴을 되찾았다. 아직 습기를 머금은 미지근한 바람이 우산과 단화를 만지며 지나가고 있는 듯하다.
내 인생에 또다시 비가 오면 튼튼한 돛단배 같은 빨간 우산을 펼치고 아픔 없는 곳에 다다를 때까지 걷기로 한다. 다만 이번엔 안전한 곳으로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첨벙첨벙 서두르지 않고, 이제 막 뽀송해진 단화가 빗물에 절어 무겁게 내 발목을 잡지 않도록 물웅덩이를 피하며 가야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빛이 비치고 바람이 불 것이다. 그렇게 또다시 뽀송해지고 어느 순간 다음 비 오는 날이 기다려지는 경지에 다다를 지도.
작품 <Holloww box diary-Umbrella> 김서울
큐레이션 @gonggan.goyoo #공간고유
<고유한 순간들-그림을 보고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