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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Jul 11. 2024

외할머니의 방

아픈 고래와 고양이

흑백의 그림. 추억에는 색이 필요 없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할 때 그 사람인지 알아볼 증거는 많다. 향기와 목소리, 크기와 촉각. 손주에게 할머니는 바다내음이 나고 깊고 낮은 목소리에 크지만 부드럽고 느린 고래였나 보다. 유영하는 고래를 바라보는 고양이는 고래와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움직이며 자기도 모르게 가르랑 소리를 낼 것 같다.


내게도 아픈 고래할머니가 계셨다. 외할머니는 전쟁통에 북한에서 내려왔다. 일가족도 남편도 없이 홀로 자식 셋을 키웠는데 일찍 중풍을 얻어 막내딸인 우리 엄마와 함께 살았다. 기억 속 할머니는 홀로 방에 앉아 하루 종일 한쪽 손으로 방을 닦으며 전쟁 이야기를 반복했다. 내가 방에 들어가면 가끔 서랍에서 용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처음엔 용돈 때문이었지만 언젠가부터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감정을 배제한 할머니의 이야기는 무용담에 가까웠다.


"북한군이 와서 솜이불에 다 숨었어. 총을 쐈는데 솜이불을 못 뚫더라고. 그래서 다 살았지. 나중에 보니까 총알이 박혀 있더라고. 진짜야."


임신한 채로 애 둘을 데리고 배를 타고 밤새 고개를 숙인 채로 넘어와서 엄마를 낳았다고 했다. 먹일 게 없어서 그냥 죽으라고 둬도 3일을 살길래 키워야 할 팔자인가 보다 하고 키웠단다. 뛰어난 생명력도 암 앞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엄마는 떠났지만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셨으니 할머니는 죽기 직전까지 막내딸을 생명력 강한 아이로 기억하셨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방. 


중얼중얼. 


할머니는 구부러진 등 때문에 땅바닥에 시선을 두고 혼잣말을 하듯 이야기한다. 그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 중간중간 연기를 하시는 할머니.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영화를 보듯 빠져든다. 등이 구부러진 작은 고래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헤엄을 치다가 문득 멈춰 나를 바라본다. 서랍에서 사탕과 꾸깃꾸깃 접은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준다. 할머니의 손은 거칠고 말랐지만 따뜻하다. 




작품 <우리 다시 만났어> 영재

큐레이션 @gonggan.goyoo #공간고유

<고유한 순간들-그림을 보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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