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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Jul 15. 2024

약 먹을 시간

혼자 여행이라는 약

결혼하고 온몸이 너무 아파서 한의원에 갔다. 한의사의 진단은 간단했다.


"어디 훌쩍 혼자 여행을 한번 다녀오세요."


알지만 그게 어디 쉽나. 아이가 어린 동안은 혼자 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 결혼하고 12년 만에 처음으로 후배 두 명과 2박 3일 동안 대만 여행에 다녀왔다. 셋은 여행 내내 거의 대화가 없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니었다. 아무도 우리를 찾지 않는 침묵의 공간,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해도 되지 않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그저 함께 걸었다. 


다음 해, 내 생일에 1박 2일 북스테이에 다녀왔다.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하루 여행 다녀오게 해달라고 그게 선물이라고 선언했다. 양평까지 가는 길은 내내 막혔지만 내 차는 자기장 위를 떠 가는 듯했다. 길이 뻥 뚫려 속도를 낼 때는 심해터널의 튜브 안을 미끄러지듯 가는 것 같았다. 1박 2일동안 책을 읽고 맥주를 마시고 처음 만난 분들과 이야기를 했다. 모든 직책과 역할을 내려놓고 그냥 '나'라는 사람으로.


혼자 여행은 가족들과 함께 한 여행이 주는 즐거움과 달랐다. 엄마이거나 딸이거나 아내일 필요가 없는 시간, 오직 나로 존재하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나와 대화했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이 안으로 향했다. 나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과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요즘 다시 병이 도지고 있다. 약 먹을 시간이다. 혼자 여행이라는 약. 목적 없이 소란 없이 조용하고 부드럽게 길과 길 사이를 흘러 다니고 싶다. 그렇게 내 존재를 숨길 때 내가 보일 것 같아서. 너무 반가울 거 같아서.


작품 <over there> 허필석

큐레이션 @gonggan.goyoo #공간고유

<고유한 순간들-그림을 보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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