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라이닝
저승에도 맥주가 있을까?
나는 술이 좋다. 고등학교 친구였던 남편과도 데이트할 때 술을 자주 마셨다. 첫 키스를 만취상태에로 해서 아무도 기억을 못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술친구와 결혼한 덕분에 매주 금요일이면 부부 스트레스를 술 한잔으로 풀어버린다.
내 동생도 술을 참 좋아했다. 과음으로 간경화를 얻어 결국 뇌졸중으로 돌아가신 아빠를 보며 동생과 나는 절대 술을 안 마실 줄 알았는데 어쩜 그렇게 둘 다 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술이야말로 내로남불의 적합한 예가 아닐까. 내가 마시면 인생이 괴로워서 마시는 거고 남이 마시면 알코올중독이다.
생각할수록 동생이 살아있을 때 더 많이 마시지 못한 게 한이다. 우리 둘이 20대 초중반이었을 때는 서로의 친구들과 직장 동료, 애인들과 마시느라 바빴고, 20대 후반이 되었을 때에는 결혼을 하고 출산과 육아로 정신이 없어 또 마시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막 육아동지로 술 한잔 기울일 수 있겠다 싶을 때 동생은 떠나버렸다.
동생을 보내고 일상에서 '동생이 살아있었다면'이라는 가정을 가끔 한다. 주변에서 여동생과 여행을 가거나 주말에 서로의 집에 모여 술 한잔 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주로 그렇다. 나도 술을 꽤 마시는 편이지만 동생도 술이 셌으니 나이 들고 마시면 꽤 흥미진진했을 것 같다. 술에 취해 싸우기도 하며 진상을 부리더라도 그렇게 또 서로에게 말 못 한 아쉬움을 털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남편과 싸우고 푸는 것처럼.
부창부수. 내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것처럼 제부도 술을 좋아했다. 중소기업의 영업부서에서 일했던 제부는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던, 내 눈에 참 사랑스럽고 고마운 사람이었다. 동생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며 나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집 근처 맥주집에서 처음 만난 날, 제부는 나에게 대뜸 작은 선물을 하나 건네주었다. 분홍 꽃이 달린 머리핀이었다. 처형이 될 사람에게 머리핀을 선물하는 남자라니! 내 동생에게는 얼마나 다정할까 싶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내 동생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다. 나에게 잘 보일 마음은 있는지 없는지 그저 자기 여자친구자랑을 늘어놓는 제부가 귀엽기도 하고 든든했다.
교통사고가 나고 동생과 제부, 조카 두 명까지 넷의 장례를 치르고 아이들이 살던 집을 치우러 갔다. 죽은 사람의 집을 치우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때 알았더라도 내가 직접 치우고 싶었을 것이다. 치우러 가기로 한 전 날 밤 꿈에 제부가 나왔다. 내가 아이들 집에 있는데 제부가 쓱 들어오더니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일하러 가지 않고 왜 왔냐는 질문에 너무 목이 말라서 맥주 한 잔 하러 왔다는 제부는 예전처럼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청소를 하러 간 나는 꿈은 까맣게 잊고 거실부터 아이들 방 화장실을 다 청소하고 나서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냉장고문을 열었을 때 나는 울고 말았다. 꿈에서 본 맥주 한 병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맥주를 좋아했던 제부가 저승에 가던 길에 목이 말랐던 걸까?
내 동생이 맥주 한 모금하고 싶다고 하니까 착한 제부가 기꺼이 심부름을 와 준 걸까?
저승에도 맥주가 있다면 좋겠다. 술 좋아하던 동생과 제부가 시원하게 마시며 이승에서 못다 한 육아와 회사 이야기를 나누고 취해서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했으면 좋겠다. 소주도 있으면 더 좋겠다. 만나자마자 얼른 소맥 한잔 말아서 잔을 부딪히며 '먹고 죽자'라고 했다가 '아 참 우리 죽었지. 그냥 먹자' 하며 깔깔깔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