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구름과 땀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나는 모자를 쓰고 바람막이 점퍼를 걸친 채 안양천을 달린다.
5km 정도의 러닝이라면 습도와 추위 모두 몸이 충분히 견딜만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불편함을 감내할 만큼 빗속을 달리는 일은 매력적이다. 특히 그 안엔 큰 비밀이 하나 숨어있다.
비가 계속 내려서 걷거나 달리는 사람이 거의 사라질 즈음이 되면 촉촉한 날씨를 기다려온 두꺼비들을 종종 만난다. 한적해진 안양천 길 한가운데로 나와 온몸으로 비를 맞던 두꺼비들이 나같이 날씨 구분 못하고 나온 러너와 마주쳐 당황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두꺼비들이 슬금슬금 풀숲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곤 한다.
물의 수위가 조금 높아진 안양천에는 두루미 두어 쌍이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은 어슬렁어슬렁 안양천을 걷거나 가만히 한 곳에 얼음처럼 서 있는 편인데 가끔 운이 좋으면 나처럼 두루미가 물고기를 사냥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다. 두루미는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어느 순간 물고기를 낚아채고 부리로 물어 한참을 흔든다. 이내 물고기를 꿀꺽 삼켜 그 얇고 긴 목 아래로 물고기를 꾹꾹 눌러 내려보낸다. 신기하게도 이런 장면을 두어 번 더 목격했는데 모두 비 오는 날이다.
목표했던 거리의 절반쯤 달리면 턴을 한다.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려 길을 바라보노라면 방금 지나온 길인데도 낯설다. 그 마음은 두려움이나 걱정보다는 새로움과 설렘에 가깝고, 온 만큼 가야 한다는 압박감보다는 목표치의 반 이상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훨씬 더 크다. 등산으로 치면 딱 하산하는 기분이다.
다시 조용히 비를 맞으며 달린다. 비는 소리도 없이 내 운동복에 스며들어 무게감이 느껴지고 나는 비로소 내 몸이 비로 흠뻑 젖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문득 비의 사연에 대해 생각한다. 이 비는 어디서 왔을까? 어떤 사연을 담고 있을까?
봉우리적운은 머금고 있던 습기를 바로 내려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그 밑을 지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내 이마와 땀으로 시작했던 물 분자가 다시 빗방울을 타고 내려와 내 이마에 다시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내 이마로 다시 돌아올 땀방울을 애초에 하늘로 올려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난 조깅을 하지 않는다. 에헴!
[구름 관찰자를 위한 가이드] p49, 개빈 프레터피니
지금 나를 적신 이 비가 내가 어제 달리면서 흘렸던 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비 맞는 일이 재미있어진다. 거기에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땀이 함께 섞여 있다는 상상이 시작되면 달리는 시간은 내내 즐거운 놀이가 된다. 우리의 땀방울이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우리에게 떨어지는 비 오는 날의 러닝. 그 모든 땀방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니.
나는 조용히 모자와 재킷을 벗어 본다.
비가 몸에 닿는 기분이 좋다. 빗방울의 감촉이 마치 누군가가 만져준다는 느낌이 들고 어떤 날은 유난히 비가 말을 건네는 듯하다.
구름은 언제나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의 중간 세계에 있다. 땅의 수분을 가져다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거나 넓게 퍼졌다가 비로 내린다. 마치 인간의 소식을 모아다가 신에게 전한 다음 그 답변을 인간들에게 전해주는 것만 같다. 인간이 보내는 메시지는 구름이 하늘로, 하늘이 전하는 메시지는 비가 땅으로 전해준다.
특별히 비는 먼저 하늘나라로 간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해 줄 것만 같다. 그래서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늘나라로 먼저 간 동생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그동안 공기 중에서 흩어지는 바람에 내가 듣지 못한 것 같아서, 비 오는 날 빗방울에 모아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보다.
혹시라도 온몸으로 비를 맞으면 그 소리가 조금 또렷이 들리지 않을까 해서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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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에게 말하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은 단 한 가지뿐이다.
변함없이 계속 걸어가라.
더욱더 잘 살아가라.
무엇보다 악을 행하지 말고 웃음을 잃지 말라.
[그리움의 정원에서] p49, 크리스티앙 보뱅
오늘도 비는 먼저 간 이들을 대신해 말한다.
변함없이 길을 걸어가라. 더욱 잘 살아가라.
그리고 나는 비 오는 날 운동화를 신는다.
변함없이 길을 걷고, 더욱 잘 살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