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차 아내의 사랑 고백

소주가 필요해

by 실버라이닝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이 시를 읽고 남편이 떠올랐다.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시를 읊어주니 자기가 언제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곡기를 끊겠다고 했냐며 펄쩍 뛴다. 문과에 법대를 나왔지만 시적 허용을 모르는 남자 같으니라고.



우리 둘의 러브 스토리는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남편과 나는 기독교 모임에서 만났다. 지금은 둘 다 교회 근처에도 안 가지만 당시 둘 다 열혈 기독교 신자였고 남편은 목사님이 되려나 싶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내가 그 모임에 나간 건 8할이 남편이 모임에 있었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의 위트 있는 말솜씨에 홀랑 반해서 맘 속으로 몰래 좋아하고 있었지만 당시 남편의 이상형이 키크로 마르고 여성스러운 여자였던 터라 차마 고백을 못하고 졸업했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과외를 가던 어느 날 마을버스에서 이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 나는 다짜고짜 연락처를 받아내고 주말에 술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분명히 그도 좋아하는 눈치였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고, (아니, 당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그에게 술을 먹였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물었고 그는 여자친구가 없다고 했다. 그럼 나는 어떠냐고 물었다. 남편은 말을 빙빙 돌려 어렵겠다고 대답했다. 표정은 분명히 좋아죽겠다는 모습인데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내 고백을 거절하고 3일 후 그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 그 제안 유효하냐고. '그럴 거면서.' 나는 피식 웃으며 당연히 유효하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의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었다. 신촌역 홍익서점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때 지하철 역 입구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모습이 여전히 슬로비디오로 기억되는 걸 보니 아직 이 남자를 사랑하나 보다.



연애를 하고 나서 남편이 처음에 나를 거절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남편은 제대 후 복학해서 학교를 다니는 상황이었다. 사법고시를 보고 싶었던 남편은 벌써부터 나중에 결혼할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의 가스라이팅이 시작되었다. 나는 끊임없이 남편에게 취업의 장점을 어필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했고 그는 결국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해 우리는 결혼했다.



남편과 나에겐 커다란 공통분모가 있었다. 술과 운동. 연애할 땐 내가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홍대로 강남으로 이태원으로 나를 잡으러 다니며 속상해했던 남편이지만 결혼한 후에는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있어 참 좋다고 했다.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 덕에 안주 걱정도 없었다. 그렇게 매일 같이 먹고 마시다가 살이 찌면 같이 운동을 했다. 매일 저녁 집 앞 안양천을 함께 달렸고 10km 마라톤 대회에 함께 참가해서 완주를 하기도 했다. 술을 마실 때나 달리기를 할 때나 서로 경쟁의식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잘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귀여운 동갑내기 부부였다.



물론 우리라고 늘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나와 남편을 모두 아는 친구는 이렇게 물었다. '와, 대박! 둘이 싸우면 누가 이겨?' 의외로 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남편.' 남편은 내가 처음으로 나보다 기센 남자라고 느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남편도 그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여자는 늘 지켜주고 보듬어 주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자기가 기대도 될 것 같은 여자 같았다나. 아무튼 그렇게 서로를 너무나 잘 알다 보니 서로에 대해 언행을 조심한다. 주로 육아문제로 종종 다투지만 어느 선까지 말해도 될지 어느 부분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이로 결혼생활을 이어왔다.



나는 여전히 그가 설렌다. 민소매를 입었을 때 보이는 팔뚝도 섹시하고 달리기를 한 후 단단해진 허벅지를 만지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남편은 나에게 어떤 색이 제일 잘 어울리냐고 물으면 '살색! 넌 아무것도 안 입었을 때가 제일 예뻐!'라고 말하는 능구렁이이다.



그렇게 어느새 16년을 살았다.



달리기를 하다가 너무 숨이 차던 어느 날, 잠시 걷기로 했다. 문득 매일 지나치던 그 길에 있던 꽃들이 인사를 했다. '아, 너 거기 있었구나. 한동안 못 알아봐서 미안해.'



남편이 생각났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준 사람. 친구이자 남편이자 남자인 그처럼 꽃은 조용히 그저 웃고 있었다. 내가 동생과 조카 둘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남편은 모든 장례 업무와 사고 처리를 도맡아 해 주었다. 처참했던 사고 현장을 일일이 확인하고 부서진 차 안에서 동생의 반지를 찾아 깨끗이 닦아 나에게 건네준 남편. 남편은 장례가 끝난 이후에도 가해자와 우리 사이의 힘든 이야기를 전달하고 조정해 주었는데 아직 그 일을 모두 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둘째를 유산하고 다시 임신했을 때 입덧이 심해 온갖 신경질과 짜증을 냈던 나를 잘 참아준 것에 대해서도, 길어진 코로나에 무작정 다시 일해야겠다고 상의도 없이 학원을 차리자 나를 믿는다고 무조건 지지해 준 것에 대해서도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남편에게 인사를 해야겠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준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해 봐야겠다. 아 그러려면, 일단 그때 그 삼겹살집에서처럼 소주 한 병이 필요하겠다. 남편은 늘 내게 '넌 소주 한 병 마셨을 때가 제일 예뻐!'라고 말했는데, 오늘도 그 비법이 통하기를!




<첫사랑>


김용택


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해 같은 처녀의 얼굴도

새봄에 피어나는 산중의 진달래꽃도

설날 입은 새 옷도

아, 꿈같던 그때

이 세상 전부 같은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

나무가 하늘을 향해 커가는 것처럼

새로 피는 깊은 산중의 진달래처럼

아, 그렇게 놀라운 세상이

내게 새로 열렸으면

그러나 자주 찾지 않는

시골의 낡은 찻집처럼

사랑은 낡아가고 시들어만 가네

이보게, 잊지는 말게나

산중의 진달래꽃은

해마다 새로 핀다네

거기 가보게나

삶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 꽃을 보러 깊은 산중 거기 가보게나

놀랄 걸세

첫사랑 그 여자 옷 빛깔 같은

그 꽃 빛에 놀랄 걸세

그렇다네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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