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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라이닝 Jan 20. 2024

엄마가 돌아왔다

희망을 가져도 될까?


1월 13일 토요일 오전


엄마는 내가 옆에 있는데 자꾸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뭐 해?"

"응, 정은이. 정은이한테 전화해야 돼."

"엄마, 나 여기 있잖아. 나 봐. 나 누구야?"

"응? 너 정은이. 근데 나 정은이한테 전화해야 돼."


핸드폰에 번호를 계속 1만 눌러서 화면이 1로 가득 찼다.  엄마의 혼란은 내가 엄마 손에서 핸드폰을 가져가서야 끝이 났다.








1월 13일 토요일 오후



문자메시지로 태권도장에서 에버랜드에 놀러 간 아들의 사진이 왔다. 


엄마가 집에 없으니 혹시 늦잠을 자서 에버랜드에 못 갈까 봐 불안했던 아들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저녁 8시에 잠이 들어 새벽 6시 반에 일어났다고 한다. 


비록 나와 엄마의 시간은 여기 병원에 멈춰 있었지만 아들의 시간은 행복하게 흐르고 있어 다행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의식이 왔다 갔다 하고 하루 종일 주무셨지만 우리의 상황은 최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엄마가 응급실에 실려가면 여전히 엄마 손이 필요한 첫째와 나를 찾으며 울고 있을 둘째 생각에 마음이 불안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이들이 많이 커서 알아서 자기 할 일을 해주니 내가 오롯이 엄마 간병에 집중할 수 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1월 15일 월요일


엄마는 주말 내내 주무셨고 잠깐 깨어 있을 동안에도 의식이 또렷하지 않아 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월요일 아침, 


담당 선생님과 상의를 하고 '요양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 두 단어를 입에 올리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담당 교수님과 주치의 선생님도 아무 말씀을 못하시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엄마가 신장투석을 하러 간 사이 잠깐 시간이 생겼다. 병원 1층 카페에 가서 인터넷으로 요양병원과 호스피스 병동을 검색했다. 


안양 근처에 있으면서 신장투석실이 함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서너 군데를 알아본 후 노트에 연락처를 적어두고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현재 상태를 말씀드리니 모두 곧바로 입원이 가능하다며 필요한 서류를 알려주셨다. 담당 선생님께 말씀드려 필요한 서류를 챙기기로 하고 일단 내가 직접 가서 병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원에서 나가기 위해 간병인을 구해야 했다. 



병원에 있는 간병인 상담 센터 직원분께 말씀드리니 바로 연결해 주셨다. 간병사분을 처음 구하는 거라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몰랐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엄마예요? 네, 잘해드릴게요. 그런데 돈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인사를 나누자마자 돈 이야기를 하는 게 낯설고 어색했지만 이젠 어른이니까 이 정도는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협회에서 제시해 준 금액과 약간 차이가 있어서 그 부분을 조정하고 간병사분을 위해 엄마 병원 식사에 흰쌀밥 한 그릇을 추가해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엔 집이 답답해서 벗어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며칠 만에 집에 오니까 정말



좋았다.






1월 16일 화요일


통화를 했던 요양병원과 호스피스 병원 두 군데를 다녀왔다. 




병원마다 상황과 환경이 다르겠지만 가장 먼저 와닿은 두 기관의 차이는 면회였다.


요양병원은 일주일에 한 번, 30분의 면회가 허용되었지만 호스피스 병동은 24시간 오픈이었기에 그 부분에 마음이 쏠렸다. 


일주일에 한 번 30분만 엄마를 보다가 만약 엄마를 떠나보내야 한다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환경도 호스피스 병동이 훨씬 더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사회복지사분이 병실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해주시는 것도 좋아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엄마의 컨디션이 호스피스 병동으로 갈 정도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었다


담당 교수님은 그 정도는 아닌 걸로 보인다고 하셨고 오히려 최근 며칠 사이 조금씩 엄마가 기력을 되찾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암말기 환자들이 대부분 상태가 호전되다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씀에 나는 기대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1월 17일 수요일


병실에는 간병사분이 계셔서 내가 가지는 못하지만 신장투석을 할 때에는 잠깐 면회가 가능했다. 엄마에게 필요한 물건을 챙겨 가서 엄마를 만났다. 


"정은아, 가서 커피 좀 사 와. 고생하는 간호사분들 좀 드리게."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며칠 새 기력을 많이 되찾은 듯 보였다. 말씀도 잘하시고, 나를 보자마자 간호사분들 좀 챙기라고 하시는 걸 보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 어머님이 늘 자랑하시던 그 따님이신가 봐요."


아픈 와중에 딸자랑을 열심히 하셨을 엄마가 상상되었다. 


"엄마, 아픈 와중에 할 건 다했네?"


하고 농담을 건네니 엄마도 쑥스러운지 잠깐 웃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상담을 했던 호스피스 병동에서 자리가 있을 때 빨리 오라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조금씩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는 엄마를 바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모실 수가 없었다.


다음 주 엄마의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또 매일 선택의 기로에 설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엄마와 내가 모두 행복할 수는 없음을 안다. 




쇼펜 하우어의 말대로


다만 모두가 덜 불행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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