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단절엄마(8)

합격과 걱정의 이중주

by YJ

"선생님, 합격되셨고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교육이 시작되니까 늦지 않게 10시까지 센터로 와주세요."


돈을 버는 일을 다시 시작해봐야겠다고 결심한 민주는 알바 구인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부터 올리고 새로 올라온 괜찮은 알바 자리가 있는지 틈만 나면 확인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알바...

대학생 이후로 처음 구해보는 알바 자리.

대학생 시절 민주는 돈벌이가 좋은 중고등학생 과외선생님도 해봤고, 편의점이나 전시 컨퍼런스 진행요원이나 국제회의 모니터링 같은 새로운 경험을 체험할 수 있는 알바도 해봤다. 그때의 민주는 할 수 있는 일에 제한이 없었다. 알바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는 흥미로운 일이면서 용돈도 벌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민주는 대학생 민주와는 다르다.

아이 둘 딸린 주부. 그리고 오래전에 끊긴 경력.

경력단절 여성인 민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더더욱이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돌아오는 일은 아직은 할 자신이 없다.

민주 같은 장기 경력단절 여성이 보통의 회사원의 스케줄인 9시 출근, 6시 퇴근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기도 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과연 아이들을 뒤로하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집에서 원격으로 학교 수업을 듣는 아이의 점심식사는 누가 챙겨주고 방과 후 영어학원은 누가 데려다 주나 그 걱정부터 떠올랐다.


초등학생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를 활짝 열어젖히고는 쳐다보기만 해도 차디 찬 얼음 아이스크림을 꺼내서 와사삭와사삭 씹어먹는다. 아이스크림을 와사삭 거리면서 오늘은 친구가 어떤 재밌는 이야기를 했는지 미주알고주알, 또 다른 친구가 급식시간에 국물을 쏟아서 벌어졌던 일이 엄청난 무용담인 마냥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아이의 말동무가 되어줄 수 없다니!

그 시간에 내가 집에 없다니!

상상조차 안됐다.

그렇지만... 아이의 말동무를 해주느라, 간식을 챙겨주느라 경력 공백기를 더 이상 늘렸다가는 일할 기회를 영영 놓쳐버릴 것만 같았다.

불안했다.

무엇보다 집에 있는 전업주부로 만족하며 살기에는 가슴속에서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무형의 그 무언가를 조용히 삭히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결심한 것이 일단 적당한 알바부터 시작해보자는 것이었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오랜만에 펼쳐놓고는 한숨만 푹푹 연거푸 내쉬면서 깜빡거리는 커서만 몇십 분째 쳐다보고 있다.

'나를 소개하라고? 내가 13년 전에 어떤 일을 했었는지 설명하는 것이 지금 나를 고용하려는 업체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10년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3년이면 강산이 바뀌고도 3년이나 더 지났는데... 13년 동안 엄마였던 경력은 이곳에는 단 한 줄도 채워 넣을 수 없겠고... 그렇다면 13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셈이네. 에휴....'


한참을 한숨만 내쉬던 민주는 어쩔 수 없이 별로 바뀐 것이 없는 이력서 저장 버튼을 눌렀다.


민주의 이력서는 다른 사람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학력 사항에 적은 출신대학교, 경력 사항에 적은 과거의 재직 회사들, 영어 성적과 자격증과 기타 활동 등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단, 그 모든 경력이 13년 전에 끝났다는 것 빼고는...


화려한 이력서를 가지고 있지만 13년의 공백기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민주에게 제안이 들어오는 알바 자리는 예전과는 많이 다른 일들이었다.

가장 많이 연락이 오는 자리는 어린이 학습지 방문교사.

학습지 선생님. 예전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일.


어제는 대형 영어교육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아마도 몇 년 전에도 파도처럼 몰려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TESOL 과정을 이수했는데 이력서에 올려놓은 TESOL 자격증을 보고 연락한 것 같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장소에 도착했다.


"민주 선생님, 이 교재를 한 번 보세요. 그리고 지금 학생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수업 시연을 한 번 해보세요."


어찌어찌 수업 시연은 대충 해낸 것 같다.


"합격 여부는 내일 오후 중에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합격되시면 처음 2주 동안 매일 이곳으로 오전 10까지 와서 교육을 받으셔야 해요. 수업 노하우나 교재 분석 같은 것 알려드릴 거예요. 그리고 그 후에 학생이 배정되면 매일 11시까지 이곳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학생 모집에 따라서 퇴근시간은 조정이 될 거고요. 이렇게 할 수 있으시겠어요?"


"아.. 네... 네.. 할 수 있어요."


매일 11시 출근이라고?

그 순간 민주는 머릿속이 하얗게 됐지만 그 앞에서 못한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있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그 자리를 서둘러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 합격 전화를 받았다.

합격 소식을 듣고 기뻤지만 한편으론 또다시 걱정이 몰려왔다.

원격 수업하는 아이의 점심은 누가 챙겨주지?

매일 11시 출근.

이 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일은 하고 싶지만 지금까지 13년 동안 점심 차려주던 엄마 역할을 이렇게 졸업해도 되는 건지 망설여졌다.

삶은 밤고구마를 입에 잔뜩 채우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것처럼 답답했다.


민주는 어떻게 해야 할까?

13년 전 광고대행사 부장님이 제안했던 입사 기회를 거절했던 그때가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민주는 결국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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