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의 시대를 사는 동안 우리 가족에게 명절은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편히 쉬는 연휴가 되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라는 방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빌미가 됐다.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사그라지며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왔다. 집합 금지라는 단어가 생소해지니 명절을 어떻게 지내야 하나, 남편의 고민이 시작됐다.
시어머니는, 알다가도 모를 양반이다. 깊이 알고 보면 여리고 순한 사람인데 순간순간 최악의 선택을 한달까? 결혼 후 첫 명절, 그전까지 결코 없던 일을 벌여 온 가족을 기함하게 한 적도 있다. 바로 전을 종류별로 한 바구니씩 굽게 한 것이다. 그것도 그간 본 적도 없던 식재료까지 사다 "주변에서 이것도 맛나다 하더라"라며 열몇 가지의 전을 만들어 내라 한 거였다. 그 모양을 마주하고 사색이 된 건 남편이었다.
지금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오징어 다리 전'은 시어머니가 부릴 수 있는 꼼수의 절정이었다. 열기만 닿아도 꼬부라지는 오징어, 그것도 다리만 스무 덩어리를 주시며 반듯하게 잘 구워내라던 어머니 얼굴에 스친 고소는.... 말을 잃게 했다.
명절을 빌미 삼아 부린 시어머니의 만용은 남편에게 답도 없는 문제가 되었다. 그러니 코로나19의 종식 선언으로 모든 일상이 회복된 요즘 남편에게 추석은 불청객일밖에....
며칠 전 남편이 나를 불러 일렀다.
"이번 추석은 집에 안 가도 될 거야." 집이라 함은 시가고, 당연히 간다 생각한 그곳에 안 가도 된다는 남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납골당이나 다녀오자 말씀드렸어. 지난번에 아버지 모시고 다녀왔을 때 아버지가 좋아하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어머니 몸도 불편하신데 명절 준비하지 마시고 납골당 다녀온다 했어." 희미하게 웃는 남편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오는 수요일에 대구 갈 건데, 당신은 그날 바쁘다 했지? 그러니 혼자 얼른 다녀올게. 괜히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하고 편히 있어." 그리 말하는 남편이 가엾어 꼭 안았다.
수요일이 됐고 남편은 아침밥도 먹지 않고 새벽같이 대구로 향했다. 해가 겨우 빼꼼 올라온 시간이었다. 오가는 길에 뭐라도 사 먹으라는 내 잔소리를 귓등으로 날려 듣는 남편은 제 몸 챙길 줄 모르는 인사라 내 맘도 영 편치 않았다.
남편을 보내고 열감기로 멍한 머리를 붙들고서 주방으로 향했다. 경주에서 대구, 대구 산격동 시가에서 칠곡 납골당까지 오고 가는 시간을 다 계산해 봐도 점심이 훌쩍 넘어야 집에 도착할 것 같지만 뭐라도 만들어 둬야겠다 싶어 바삐 움직였다.
갖은 재료와 나만의 비법을 더해 튼실한 닭을 푹 삶고 그에 곁들일 죽도 만들어 둔 후에야 일이 손에 잡혔다.
새벽에 나갔다지만, 겨우 12시 조금 넘어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다며 연락이 왔다.
"점심은?" 아침을 거르고 나간 남편의 뱃속 사정이 궁금했다.
"아... 뭐 하나 사 먹고 갈게."
순간 울컥, 뜨거운 뭔가가 명치에서 솟구쳤다. 하지만 남편에게 내색할 수 없어 눌러 참았다. 집에 먹을 걸 해뒀으니 곧장 오는 게 어떠냐는 내 제안에 남편은 배가 너무 고파 힘들다 했다. 눌러 참은 감정이 다시 머리를 디밀었지만 내 감정보다 남편이 우선이다. 간단한 요기만 하고 오라는 답하고 휴대전화를 내려놓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몇 시간 후 돌아온 남편의 얼굴이 퀭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됐다 여기면서도 상한 속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고단한 몸을 누이는 남편을 뒤로하고 나온 마음이 복잡했다.
평생, 형이 나눠 들어야 할 짐을 혼자 감당하는 것도 모자라 남편의 부모님은 그 노고를 인정하는 법이 없다. 고맙다, 장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그 말도 못 해줄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게다가 몇 달 만에 찾아 간 아들을 매번 굶겨 보내는 사정도 모르겠다. 타지에 살다 돌아오면 골목 입구서부터 음식 냄새가 그득하게 풍겨오게 지지고 볶아댄 엄마를 둔 나로서는 알 방도가 없다.
결혼 후, 한 번도 우리에게 밥상을 내어준 적 없던 시어머니. 새벽같이 달려간 아들을 기어이 굶겨 보낸 어머니, 당신의 안위가 나는 궁금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