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엔젤라권 Oct 08. 2020

지폐 한 장의 무게

I'm my father's daughter.

90년대 중반,

당시 가장 친했던 동갑내기 미국 친구 J는 한국생활 2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휴학하고 한국에 놀러 왔다가 생각보다 오래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있던 J는 유명 어학원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홍대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J는 당시 자주 화두에 올리던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국인 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누구는 미국에서 계약한 에이전시에게 사기를 당해 지낼 곳도 마땅치 않다더라, 누구는 아이비리그 출신인데 이름 모를 학원과 이상한 계약을 해서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등…


인터넷은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가 전부였던 시절,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이 학교나 학원의 그레이드Grade며 컨디션Condition을 사전에 체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같은 맥락으로 한국의 학교와 학원은 교수나 강사로 채용할 외국인들을 찾는 일도, 리퍼런스와 실력을 체크하는 일도 모두 쉽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을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는 내 앞의 착하고, 성실하고, 괜찮은 대학을 다니다 한국에 온, ‘바른 영어’를 구사하는 J를 바라보았다.


우리 같이 일 해볼까?

"내가 한국의 대학과 어학원을 리스트업하고 채용조건을 확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또 네(J)가 친구와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를 연결해서 믿을 수 있는 강사들을 리스트업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고… 어때?”


J의 눈이 반짝였다.  “I can do that!”


파트너에 대한 신뢰는 이미 쌓여 있고, 각자의 역할은 더없이 명확하고, 언뜻 생각했을 때 초기 자본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다. 우리 둘의 시간과 발품을 들이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터넷 검색만으로 대부분의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파일을 보낼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엔 모든 정보를 직접 찾아가서 물어물어 확인해야 했고, 자료도 직접 만나서 주고받거나 우편으로 보내야 했다. (아~ 옛날이여~)


한 가지 간과했던 부분은 국제전화요금과 국제우편요금이었다. 리퍼런스 체크를 위해 미국에 자주 전화를 해야 했던 우리에게 국제전화요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쌌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장시간 통화를 한다는 건 지나친 부담이었고, 매달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전화요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그렇다고 국제우편으로 주고받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조카들에게 얘기하면 갸우뚱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ㅡ,.ㅡ)


이런저런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우선 J는 리퍼런스가 확실한 미국 친구들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나는 인맥이 닿는 학교와 학원을 컨택하여 조건을 협의해 나갔다. 요즘 말로 스타트업의 시작이었다.


서울에 혼자 살고 있는 딸을 걱정하던 엄마아빠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하셨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이미 나보다 작아진 귀여운 엄마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서울에 올 때마다 두 손 가득 뭔가를 들어 날랐고, 주방과 별로 친하지 않았던 나는 몇 년 후 이사를 하면서 그 존재들을 알게 됐었다. 약탕기, 글라인더, 압력솥 등…


엄마는 약속을 정하지 않고 자주 집으로 찾아왔지만, 아빠는 선약을 잡아 서울역 커피숍에서 만나곤 했다.

아빠는 정이 많고 가정적인 동시에 경상도 남자 특유의 무뚝뚝함과 보수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오빠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 집의 통금시간은 10시였다. 당시 뉴스는 9시에 시작했고, 아빠는 뉴스가 끝나면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아빠가 안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 가족은 모두 ‘안전하게’ 집에 들어와 있어야 했다.


나는 ‘아빠는 보수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는 건 아빠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것 같아서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고, 유학을 가겠다 마음먹었을 때에도 나는 아빠의 반대를 기대(?)하고 있었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뭔가를 추진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엄마의 지지 덕분이라 생각했다. 아빠는 엄마가 설득하면 되니…


나의 선입견은 성인이 되고도 꽤 긴 시간 동안 바뀌지 않았다. 아빠는 내가 해외만 나가면 아픈 것 같았고, 통화할때마다 ‘막내가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랑과 걱정과 죄책감에 나는 가능하면 일정을 줄이려 노력했었다.


2~3주에 한 번은 엄마아빠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우리는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며 전화로 짧게 묻는 안부에서는 하지 못했던 근황 토크를 이어갔다. 

그 날의 원픽은 나와 J의 스타트업이었다. 나는 아직 리서치와 리스트업 중이며 조금씩 업무를 구체화시킬 계획이라고 얘기했고, 엄마아빠는 20대 초반 아이의 엉성한 사업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차를 마시며 수다를 이어가던 우리는 엄마아빠의 기차 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처럼 손에 손잡고 개찰구까지 걸어가 가족 허그를 하고 있는데, 아빠의 손이 나의 청바지 뒷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오는 게 느껴졌다.


아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람조심, 차조심, 길조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는 엄마 몰래 윙크를 두 번 했다. 아빠가 엄마 몰래 용돈을 줄 때 보내는 비밀 신호다.


나는 엄마아빠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사업가인 아빠가 사업가가 될(지도 모를) 딸에게 주는 ‘사업 밑천’ 같은 느낌!

소름이 돋고 눈물이 날 것 같이 벅찬 순간이었다.

순간, 무한 긍정의 에너지가 솟아올랐다.


부모님의 믿음은 자식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PS.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뉴스에서는 ‘취업비자working visa’없이 일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집중단속이 이어진다는 정부의 발표가 연일 기사화되었다. 처음부터 취업을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가 한국에 남기로 결정한 많은 외국인들은 ‘불법’으로 일하고 있었고, 이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22살의 첫 스타트업은 현실을 받아들이며 준비과정에서 정리하게 됐지만, 아빠의 믿음이라는 가장 큰 자산은 그 후로 현재까지 내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일에 든든한 밑천이 되고 있다.


by 엔젤라권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이 아닌 감정으로 떠올릴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