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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Sep 22. 2021

"와이프랑 상의해 보고 오겠습니다."

<슬기로운 의사 생활>

최근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본 <슬기로운 의사 생활>은 내가 열렬히 빠져들어 즐길 수 있었던 드라마는 아니었다. 한국에 있었다면, 그래서 한국어로 된 콘텐츠들이 그립지 않았다면 솔직히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나는 과몰입해서 여러 번 보든가 아니면 아예 보지 않든가 둘 중 하나이지, 가볍게 한 번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악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소소하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들과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는 멋진 음악까지, 많은 이들의 '힐링' 드라마였던 이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 나는 빠져들지 못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나는 콘텐츠의 성 차별적 요소에 민감한 편이어서, '마초' 남주인공이 '벽에 밀치고 키스', '가려는 사람 홱 돌려서 끌어안기'처럼 로맨스를 가장한 폭력-내 기준으로는 그러하다-을 행사하는 장면을 혐오하는 것은 물론이고, 멀쩡하고 멋있던 남주인공이 본인을 "오빠"라고 지칭하는 순간 매력이 그야말로 파사삭,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기도 한다. 드라마의 김준완(정경호 분)이 스스로를 "오빠"라고 지칭한 순간도 그러했다. 익순이(곽선영 분)가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친구의 동생이라서 그랬을 것 같기는 한데, 듣는 순간 거슬렸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는 "나"로 바뀌면서 조금 듣기 편해졌지만.

안정원(유연석 분)과 양석형(김대명 분)은 직장 내 상하관계가 있는, 심지어 안정원은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연애를 한다. 드라마에서는 어리고 직장 내 권력이 없는 여성 쪽에서 사랑을 적극적으로 고백하는, 그러니까 거절할 수 없는 입장에서 로맨스를 강요당한 것이 아닌 것으로 그려지지만 나는 이것이 영 불편했다. 과연 저들이 '평등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정원의 친구인 채송화(전미도 분)는 이들의 연애 사실을 듣고 축하해 주는데, 나라면 20년 넘게 알고 지낸 남사친이 나이 마흔에 10살 이상 어린 전공의와 사귄다고 하면 "야 이 도둑 x아, 정신 차려!"라고 하지 "잘 됐네,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린다!"라고 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유일하게 맘 편히 볼 수 있었던 커플은 주인공 5인방 중 그러니까 이익준(조정석 분)과 채송화뿐이었다. 평등하고, 앞으로도 평등할 수 있을 것 같은 관계.


<슬기로운 의사 생활>이 좋지 않은 드라마였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열렬히 좋아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주요 설정에 있었다는 것뿐. 내가 드라마를 그저 드라마로만 볼 수 있었다면, '저 커플들이 과연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는 인간이 아니었다면 보다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내가 가장 감동받은 대사는 시즌 2 10화, 도재학(정문성 분)의 "와이프하고 상의를 좀..."이었다.

해당 회에서 재학과 아내 효주(양서빈 분)는 전혀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았던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한때 아기를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잘 되지 않아 슬프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둘이서 재미있게 늙어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포기하고 있던 찰나에 찾아온 아기. '당연히' 기쁠 거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 순간 인물들의 감정을 그렇게 단순하게 그리지 않아 좋았다.


효주는 자신이 나이도 있고, 이미 아기를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을 유지해야 할지 고민된다고 말한다. "남편하고 상의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라고 산부인과 의사인 양석형에게 말하는 효주와 눈을 마주치며 재학은 그저 지지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임신과 출산은 어찌 됐든 아내의 생각이 더 중요한 일이고, 자신은 아내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듯이. "어떻게 찾아온 아기인데 당연히 낳아야지! 내가 무조건 엄청 잘할게!" 따위의 대사를 내뱉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명인데, 낳으셔야죠."라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고 평범하고 담담한 어조로 아기의 초음파를 보여주며 아기 상태는 정상 범주에 속한다는 정보만을 전달하는 석형도 참으로 좋은 의사라고 생각했다.

초음파를 본 재학의 표정은 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내지는 감동으로 흔들리지만, 다시 한번 정신줄을 잡고 "교수님, 저 와이프하고 상의를 좀..."이라고 말한다. 아내의 의사부터 들어보겠다는 거다.

여기서 효주가 덥석 "엽산은 언제부터 먹으면 되나요? 저 자연 분만할 수 있어요? 예정일은 언제인가요?"라고 폭풍 질문을 퍼부으며 임신 유지를 결심하는 장면은 '클리셰'에 가깝지만, 나는 이 일련의 장면을 '임신 소식을 들은 순간 뛸 듯이 기뻐하는 난임 부부'만으로 그리지 않아 준 것에 작가를 비롯한 제작진들에게 깊이 감사했다.

아기를 가지려고 계속 노력하던 중에 아기가 생겼다면 당연히 부부 모두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아기를 낳아 키우기에는 나이도 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하고 아이가 없는 삶 쪽으로 인생의 방향타를 어느 정도 튼 상태에서 덜컥 찾아온 아기는 그저 행운으로 여겨지지만은 않을 것이다. 특히 커리어와 건강이 걸려있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어쨌든 아기가 생겼으니 해피엔딩이지."라는 결론으로 쉽게 몰아가지 않고, 또 "낳기만 해 줘, 내가 잘할게."라는, 대체 뭘 잘하겠다는 것인지조차 불분명한 남편의 설득에 넘어가는 것으로 그리지 않은 것이 너무 좋았다. 특히 의사가 보여준 아기 초음파 사진에 눈빛이 흔들리면서도 끝까지 부부가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우선임을 잊지 않은 도재학 선생은 내가 한국 드라마에서 거의 보지 못한, '유니콘' 같은 캐릭터였다.



도재학 선생은 오랫동안 고시 공부를 하다 잘 풀리지 않아 의사가 된 사람이다. ‘잘 풀리지 않은 게 의사’라니 얼핏 ‘아담한 대저택’ 같은 헛소리 같기도 하지만, 재학이 깍듯이 모시는 교수 김준완보다 한 살 밖에 어리지 않다고 하니, 나이에 비해 매우 늦게 직업적 성취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설정이다. 짠돌이로 유명하고 본인도 상당히 열심히 살고 있지만, 가정을 이룬 성인이 수입은 전혀 없이 공부만 몇 년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효주가 경제적으로 받쳐준 힘이 컸을 것이다.

난임 시술은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다. 병원에서 다른 선택지 없이 통보하는 날짜에 반차나 연차를 내고 가야 하는 것은 직장 여성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다. 직장에서 눈치 받으면서, 잘 생기지 않는 아기로 인해 몸도 마음도 고생하면서, '차라리 일 때려치우고 아기 갖는데만 몰두하고 싶다'는 마음이 효주에게 왜 없었을까. 아무리 커리어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수입이 넉넉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고, 남몰래 속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학은 “일 끝나고 와이프랑 맥주 한 잔 하면서 둘이 이야기하는 게 제일 큰 행복”이라고 준완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털어놓는다. 부부 사이가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이 나는 도재학 선생이 비록 경제적 능력이 한동안 없었고 극 중 전세 사기를 당할 만큼 속 터지는 캐릭터이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라서 가능한 것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들 부부에게 오랫동안 아기가 없었고 그로 인해 고생을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쩌면 드라마상의 시점이 아기를 갖기에 딱 좋은 시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서 아기가 찾아왔다면, 재학은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우선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아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럼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펠로우 도재학’이 아니라 ‘환자의 보호자 14’ 역할이 되었겠지.

하긴, 그것도 나름대로 좋은 인생이 펼쳐졌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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