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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지 Oct 23. 2021

'오글거리는' 사람들의 승리

<낭만닥터 김사부>

강원도 정선 근처에 있는 '돌담병원'. 인력도 장비도 부족한 작은 시골 병원이지만 나름 응급실과 수술실까지 갖춘 '종합 병원'이다. 농기계에 다친 사람들이나 교통사고 환자들로 걸핏하면 수술 스케줄이 꽉꽉 차는 이 돌담병원에 '재야의 은둔 고수' 천재 외과의 김사부(한석규 분)가 있다.


김사부의 본명은 부용주. 그는 한때 '거대병원'에서 근무하던 국내 최고의 외과 의사였다. 일반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남들은 하나 따기도 쉽지 않다는 전문의 자격증을 세 가지 분야에서 따고 '신의 손'이라고까지 불리었으며, 그에게 수술을 받기 위해 정치인부터 재벌까지 줄을 섰다.

어느 날 부용주는 자신에게 수술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 중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에게 거대병원 측에서 대리 수술을 시행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대리 수술 중 한 건에서 자신이 아끼던 제자가 죽고 만다.

분노한 부용주는 모든 것을 세상에 밝히려고 했지만, 그렇게 해 봤자 정작 배후에서 이를 주도한 원장 도윤완(최진호 분)은 멀쩡할 것이고 대리 수술을 진행한 의사와 간호사 등 도윤완의 '도구'로 쓰인 사람들만 다칠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찌 보면 자신도 도윤완이 판을 깔아 준 '신의 손' 마케팅에 놀아난 책임이 있는 셈 아닌가. 결국 부용주는 입을 다물고, 자신이 모든 잘못을 덮어쓴 채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이름도 바꾸고, 부도 명예도 버린 채 십 년 가까이 돌담병원에서 오직 인술(仁術)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던 김사부 앞에 어느 날, 윤서정(서현진 분)과 강동주(유연석 분), 그리고 도인범(양세종 분)이라는 세 어린양(?)이 오게 된다.


어떤 순간에도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김사부와 내면적인 성향이 가장 일치하지만, 연인이 눈앞에서 사고로 죽어 PTSD(외상  스트레스 장애) 시달리는 의사 윤서정.

자신이 중학교 때 돈 없고 빽 없는 집이라 아버지가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하고 응급실에 방치된 채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서 '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의사가 된, 권력욕과 자격지심으로 가득 찬 강동주.

그리고 도윤완의 아들로 의사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지만 악바리 강동주를 '실력'으로 이겨본 적이 없다는 것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도인범.

이렇게 다소 하자(?) 있는 세 젊은 의사가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돌담병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김사부에게 무지막지하게 혼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가 <낭만닥터 김사부>의 주된 줄거리이다.



김사부는 돈 앞에서도 권력 앞에서도 초연하고, 어떤 순간에든 오직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의 명대사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사람 살리는 거, 그게 내 주 종목이다." (3화)

"난 내 일 할 테니까 넌 니 일 해. 니가 뭘 어쩌든 난 이 아이 수술해야겠으니까." (10화)

"열심히 살려고 그러는 건 좋은데, 우리 못나게 살지는 맙시다. 사람이 뭣 때문에 사는지, 그거, 알고나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 (10화)

"의사는, 적어도 한 생명을 집도하는 서전(Surgeon)이라면, 그 생명과 맞먹는 책임감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거야." (12화)

"나는 병원 문을 닫을 생각이 없어. 어제처럼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여기 이 자리에 서서 날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계속 기다릴 거야." (18화)

"너는 세상 바꿔보겠다고 이 짓거리하냐? 나는 사람 살려보겠다고 이 짓거리하는 거야.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그 순간만큼은 내가 마지노선이니까. 내가 물러서면 그 사람 죽는 거고, 내가 포기하지 않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 사람 사는 거고. (중략) 그것을 전문용어로 개멋부린다고 그러지. 좀 더 고급진 말로는, 낭만이라고 그러고." (20화)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라.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나는 거다." (20화)

그리고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이것이다.

"내 구역에서는 오로지 하나밖에 없어. 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


생각해보면 김사부는 돈도 명예도 다 가져 보았었다. 유명인들이 돈을 싸들고 와서 수술을 부탁하던, 얼굴이 곧 명함이던 사람이었으니까. 한 번 가져보아 덧없다는 것을 아니까 놓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돈과 명예라는 것의 가장 큰 속성 중 하나가 있다가 없으면 견디기 어려운 '중독성'이니, 어찌 보면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보다 그것을 다 버린 쪽이 더 대단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김사부의 영향을 받아, 윤서정, 강동주, 도인범도 점차 '제대로 된’ 의사가 되어 간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돈의 유혹이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사리지도 않고, 사람을 살리는 것에만 집중하는 의사로 성장한다.


도윤완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시종일관 김사부와 돌담병원 사람들을 비웃는다. 이런 시골 병원에서 돈도 안 되는 외상 환자 수술이나 주야장천 하고 있는 저들의 행동은 위선이라고, 돈과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 '신 포도' 취급을 하면서 고고한 척 가식을 떨고 있을 뿐이라고.

도윤완은 김사부에게 묻는다.

"당장 몸만 고되고 돈도 안 되는 이런 병원에 남아있을 의사가 과연 몇 놈이나 되겠어, 응?"

김사부는 대답한다.

"난 그렇게 믿고 있어. 아직은 의사 '사장님' 되고 싶은 애들보다 의사 '선생님' 되고 싶은 애들이 훨씬 더 많다고 말이야. 아, 인범이(도윤완의 아들) 포함해서 말이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돈, 권력,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것을 그저 '솔직하다'라고 하게 되었다. 법에 저촉되지만 않는다면, 혹은 저촉된다 해도 잡히지만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고.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권력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싫다고 하면, 그게 가식이고 위선이지."

같은 말이 '삶의 지혜'나 '통찰력 있는 한 마디'인 양 회자된다.

그리고 돈이나 권력이 싫지는 않을지 몰라도, 돈이나 권력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김사부 같은 사람들을 우리는 '오글거린다'라고 표현하게 되었다. 내가 추구하지 못하는 고결한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을 존경하지는 못할지언정, 뭘 모른다고 비웃게 되었다.


그래서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좋았다.

손해 안 보고 '똑똑하게' 살려고 하던 강동주나 도인범 같은 인물들이 김사부를 한심하게 여기고 그의 방침에 어깃장을 놓다가 점차로 존경하게 되는 것이 좋았다. 도윤완이 김사부에게 '한 방 먹이려고' 보내는 인물마다 김사부의 이상(理想)에 감화되고 마는 것이 통쾌했다. 현실성이 없을지 몰라도, 도윤완 같은 사람에게 김사부가 끝내 지지 않아서 좋았다.

비록 드라마 안에서지만, '오글거리는' 낭만주의자들의 승리가 반갑고 고마웠다.



김사부 캐릭터의 실제 모델이라고 알려진 이국종 교수님은 지난 2020년 권역외상센터장을 사임하면서, 외압과 비리가 있었고 그로 인한 고충이 상당했음을 밝히는 인터뷰를 한 바 있다. 과거 존경하던 멘토로부터 “나쁜 보직을 감수할 자세만 되어 있으면 굳이 타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한 이 교수님은 의료 시스템의 현실을 알리고 개선을 위한 목소리를 계속 높이고 있지만, 드라마 속 김사부와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신 모양이다.


이 글을 쓰려고 오랜만에 <낭만닥터 김사부> 관련 소식을 검색하다, 시즌 3가 곧 제작될 예정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드라마가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드라마의 현실 고증이 너무 뛰어나면 극 중에서까지 팍팍한 현실을 봐야겠냐며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드라마와 현실의 ‘싱크로율’이 몇 %이든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나지만, <낭만닥터 김사부>만큼은 현실과 싱크로율이 좀 올라가 주었으면 좋겠다. 드라마가 현실 쪽으로 끌려오지 말고, 현실이 드라마를 닮아가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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