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 더 시티>
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2000년 즈음 큰 인기를 끌었던 미국 HBO 채널의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1997년 출간된 동명의 책을 각색한 것에서 출발해 총 6개의 시즌으로 방영되었고 두 편의 영화로도 제작된, 그야말로 '레전드급' 인기 미드 중 하나였다.
뉴욕을 배경으로 칼럼니스트 캐리 브래드쇼(Carrie Bradshaw), 홍보회사 사장 사만다 존스(Samantha Jones), 변호사 미랜다 홉스(Miranda Hobbes), 미술관 큐레이터 샬롯 요크(Charlotte York), 4인의 30~40대 여성의 일과 사랑,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었는데, 이 드라마를 통해 뉴욕이라는 도시와 커리어 우먼의 화려한 삶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된 이십 대 여성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방영 당시에도 주인공들의 생활상에 경제적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내용 중에도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그전까지 미디어에서 많이 다루어지지 않던 '여성의 성(性)'을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었다. 더불어, 그 이전까지 미드를 본 적이 거의 없던 나에게는 40대를 포함한 여성 4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라는 점도 매우 새로웠다. 당시 한국 드라마 여성 주인공이 '직업적으로 성공한 40대 미혼'이라는 설정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으니까.
네 명의 친구들은 주말에 함께 브런치를 먹는데, 이 모임에서 캐리가 칼럼의 소재를 얻거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면서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시즌 4의 에피소드 11에서는 바빠서 연애할 틈도 거의 없는 미랜다가 오래 알고 지낸 바텐더 스티브(Steve)가 고환암에 걸린 것을 위로해 주다 하룻밤을 같이 보냈는데 덜컥 아기가 생긴 것을 알게 된다. 고환암인데 아기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거니와 아기를 키울 여건도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미랜다는 친구들에게 중절 생각임을 밝혔고, 친구들은 미랜다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자신들의 임신 중절 경험을 털어놓는다. 사만다는 두 번, 캐리는 한 번. 당시 아기가 잘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을 하고 있던 샬롯은 차마 더 듣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이 에피소드가 나에게 인상 깊게 남아있는 이유는 캐리의 임신 중절 경험을 대하는 전반적인 극의 시선이랄까, 분위기가 한국과는 매우 달라서였다.
1988년 Saloon이라는, 캐리의 주장에 의하면 나름 '핫 플레이스'였던 식당에서 일하던 웨이터와 캐리는 술에 잔뜩 취해 심지어 길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캐리는 임신을 했었고, 웨이터에게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은 채 혼자 중절을 했다. 당연하다, 웨이터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그렇지만 그에게 말하고 아버지가 될 선택권이라도 주었어야 했던 걸까?(캐리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한국 상황과 매우 다르긴 하다.) 당시에도 쉽게 결정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새삼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1%의 의심이 생긴 캐리는 용기를 내서 Saloon에 다시 가 보기로 한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그 웨이터가 아직 일을 하고 있었다. 약 13년이 지났는데.
주문을 받으러 온 그에게 캐리는
"13년 전, 터널에서 그날 밤 있잖아요..."
하고 말끝을 흐려보지만,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저는 터널에 간 적이 없어요."
라고 한다.
"아뇨, 있어요."
"... 미안해요, 기억이 안 나요. 제가 혹시 뭐 실수한 건..?"
"... 아뇨, 당신은 완벽하게 신사적이었어요."
캐리는 그가 주문을 넣으러 주방 쪽으로 간 사이, 테이블에 돈을 올려두고 식당을 나와버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그때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지만, 나의 인생은 전혀 달라졌다.'
13년 전 그 아기를 낳았다면 지금의 칼럼니스트 캐리 브래드쇼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캐리가 "당신은 터널에 간 적이 있다"라고 했을 때 "무슨 헛소리냐"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묻는 그 웨이터의 태도로 보아 양육비를 안 내놓을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랑하기는 커녕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생긴 아기를 함께 키우는 것이 그리 행복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다 의외로 둘이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할 수도 있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확률에 기대느니, 현실적으로 내 여자 친구 혹은 자매가 캐리와 같은 입장이라면 캐리와 같은 선택을 하기를 권할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비혼모가 남자 쪽으로부터 양육비를 제대로 받는 비율은 5~20%라고 하니, 지옥도가 펼쳐질 가능성은 더욱더 높으므로.
드라마가 임신을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선택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른 선택이 꼭 '악한',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캐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그날 밤, 캐리는 남자 친구 에이든(Aidan)에게 자신의 임신 중절 경험을 털어놓는다. 죽을죄도 아니지만 바람직한 경험도 아닌지라 몇 번을 망설이며 진실을 털어놓는 캐리의 대사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캐리는 처음에는 자신이 당시 18살이었다고 했다가, 결국 22살이었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I should have known better."
캐리가 한국인이었다면 이 대사가 반대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22살에 한 짓을 18살에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18살에 한 짓을 22살에 했다고 거짓말하는 쪽이었을 거라고. 한국이라면 '미성년자가 성관계를 한 것' 자체가 훨씬 더 문제가 될 테지만, 이 드라마가 펼쳐지는 세계관은 무책임한 성관계를 '성인'이 저지른 것이 훨씬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당시의 나에게는 이 부분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사실 한국은 지금도 여전히 이 에피소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인들의 무책임한 성관계보다 미성년자가 성관계를 하는 것이 더 '돼먹지 못한' 일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그리고 '임신 중절이 그때로서는 최선이었다'라고 후회하지 않는 주인공이 드라마에 나오는 것도 어려울 거라고.
한편, 브런치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샬롯은 며칠 후 길에서 미랜다를 마주친다. 하필이면 의사로부터 난임 판정을 받고 나오는 길이었다. 미랜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갈 곳 없는 분노와 좌절감으로 미랜다에게 화를 내는 샬롯에게 미랜다는
"네가 집으로 가는 동안 몇 걸음 뒤에서 따라 걸을게.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어서 누군가랑 이야기하고 싶어 질지도 모르니까."
라고 한다. 샬롯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미랜다가 뒤에 있다는 것을 내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 후, 미랜다는 고민 끝에 아기를 낳을 것을 선택한다. 샬롯은 그러한 미랜다의 결정에 자신이 아기를 가진 것만큼이나 기뻐한다. 비혼주의자에 자유연애주의자인 사만다는
'얘가 고생길을 선택하는구먼.'
하고 생각하는 것이 표정에서 마구 보이지만, 미랜다의 선택을 존중한다. 22살의 자신은 다른 선택을 했고 후회하지 않지만, 30대 중반 미랜다의 상황은 다르니까 이를 이해하는 캐리도 곁에 있다. 그렇게 3명의 이모가 탄생하는 것으로 이 에피소드는 끝을 맺는다.
당시에는 재미있게 본 드라마지만, 지금 다시 보면 출연진들의 인종적인 다양성도 부족하고, 시즌이 거듭될수록 주인공들의 일이나 성공보다는 사랑과 가족을 꾸리는 것 쪽으로만 무게가 쏠린 것이 아쉽기도 하다. 출연진 사이의 불화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즐거운 마음으로 정주행을 하기 어려운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를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다. 임신 중절도 임신 유지도 누군가가 고민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을, 어느 때든 지지하고 옆에 있어주는 여자들의 찐한 우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드라마나 영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검색창에 '섹스 앤 더 시티 명대사'라고 치면 수십 개가 줄줄이 나올 정도로 명대사도 굉장히 많지만, 캐리의 생일에 넷이 모였을 때 샬롯과 사만다가 이야기한, <섹스 앤 더 시티>의 정수(精髓)를 담은 것 같았던 대화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있잖아... 우리가 서로의 천생연분(soulmates) 아닐까? 멋진 남자들은 재미로 인생에 끼워주는 거지."
"와, 그거 괜찮다.(Wow, that sounds like a p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