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번잡한 쇼핑몰. 나는 종종 걸음으로 급하게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남자친구의 짜증난 음성이 벌써 들리는 듯 하다. 5분 밖에 안 지났는데 그냥 걸어갈까. 쇼핑몰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물건 구경하라며 소리 높이는 판매직원들 소리, 돌고래처럼 높은 피치로 떠들면서 뛰어다니는 아이들, 가게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 소리, 뒤에서 밀치면서 어딘가로 급히 달려가는 점원. 온갖 소리와 움직임을 느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멀리서 그의 모습이 보인다. 굳게 닫힌 입술을 보니 이미 기분이 안좋은 상태다.
"자기야, 나 왔어. 좀 늦었지. 미안미안~~~"
더 화내기 전에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본다.
"왜 이제와. 내가 얼마나 서있었는지 알아? 오늘 시간 내기 얼마나 힘들었는데. "
"응… 미안해~~ 자기 바쁜거 알면서 내가 늦어버렸네. 대신 내가 커피 사줄께~~"
남자친구는 커피 마시는 동안에도 스마트폰만 들여다 본다. 몇 주 만에 본건데. 내 얼굴은 보는 둥 마는 둥 한다.
"…………. 오늘도 일 해야 돼?"
"응. 다음주에 큰 계약 하나 잡혀 있어서. 조금 있다 사무실 들어가 봐야 해."
"그렇게 바빠서 어떡해. 우리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건데. 알고는 있어?"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바쁘면서도 힘들게 시간 내줬잖아. 늦게 오지나 말아."
나는 엷게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아 잠깐만. 건드리지마. 나 뭐하고 있잖아."
그가 귀찮다는 듯 내 손을 뿌리쳤다.
"………………………"
나를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던 걸까. 서늘한 바람이 내 심장을 스치고 지나간다. 능력 있고 리더십 있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친구였다. 처음 만났을 때 저돌적으로 밀어 부치며 다가오는 그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고 나에게 없는 그 카리스마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존재감 확실한 그와 있으면 나와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랬던 그가 변한 걸까. 아님 내가 변한 걸까. 요즘은 왠지 나를 밀어내는 듯 서늘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나는 그에게 모든 걸 맞춰주고 있었다. 어쩌다 내가 빈틈을 보이는 날엔 이렇게 싸늘하고 신경질적인 그의 모습을 보며 미안해하고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였다.
남자친구가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식사를 하러 갔다. 나는 아직 기분이 풀리지 않은 그의 눈치를 보며 메뉴 판을 보여줬다.
"뭐 먹고 싶어? 맛있는거 먹자~"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별거 없네 뭐. 난 그냥 이거."
"…………"
음식을 주문하고 마주 앉아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그는 온통 일에 정신이 쏠린 듯 스마트폰만 봤고 나는 오늘 괜히 나오라고 해서 바쁜 사람 귀찮게 했구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그런데 착오가 있었는지 내가 주문한 음식과 다른게 나왔다.
"어… 나 이거 안시켰는데…"
"뭘 멍하게 있어. 제대로 달라고 해야지."
직원은 주문이 잘못 들어갔다면서 지금 다시 주문을 넣으면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했다. 일이 바쁜 남자친구를 두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럼 그냥 이걸로 먹을게요."
"무슨 소리야? 왜?"
"괜히 시간 아깝잖아. 이거 먹어도 돼."
"넌 왜 자기주장을 못하고 그렇게 어물쩡 넘어가냐? 주문한게 잘못 나왔으면 직원한테 사과 받고 빨리 내오라고 말해야지."
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옆 테이블의 남녀가 흘끔거리며 우리를 쳐다 봤다. 이게 그렇게 훈계들을 만한 일인가 싶어 속상했다. 내가 약속시간에 5분 늦은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이러는 걸까.
"자기야….. 별일 아닌 것 가지고 꼭 그렇게 다그치듯 말해야 돼?"
"내가 뭐 어쨌다고 예민하게 그래. 맨날 그렇게 예민해서 어떻게 살래. 울어라 또."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직설적인 말을 퍼부어 놓고는 자기가 화가 난 듯 내 얼굴을 보지도 않는다. 결국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사람들 이목이 집중 될까 고개 숙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진짜로 울어? 정말 어처구니 없다. 챙피해서 여기 못 있겠다."
의자 미는 소리가 나고 그가 일어섰다. 내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울고 있는 나를 혼자 남겨두고 식당 밖으로 걸어나가 버렸다. 더 이상 혼자 앉아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기다리나 싶어 연신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를 두고 정말 혼자 가버린 거였다. 순간 심장이 내려 앉으며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그리도 잘못한 걸까. 한동안 우리는 서로 연락 하지 않았다. 나는 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 상황을 되짚어 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었지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정서적 학대'라는 말을 그와 나의 관계에 빗대어 보았다. 자기애가 강하고 타인의 입장이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남자와의 관계는 분명 내게 정서적인 학대로 다가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와 함께한 시간을 되돌아 보고 그로 인해 아팠던 상황을 천천히 들여다 보았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그는 지적이고 언변이 좋아 어디서든 주목 받는 사람이었다. 적극적이고 리더쉽 있는 모습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도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고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 자기 관리를 잘해 멀끔한 외모에 호감 가는 인상을 주는 남자. 그렇게 괜찮은 남자와 만나면서 나는 왜 정서적으로 학대 받는 느낌이 들었을까.
그와의 관계가 계속될수록 내가 고민했던 것은 깊이 있고 친밀한 대화의 부재였다. 일상적인 대화와 가벼운 농담도 좋지만 힘들 때 속내를 털어 놓고 위로 받고 싶은 내 심정을 그는 헤아리지 못했다. 우리는 분명 연인이었지만 둘만의 비밀이나 은밀한 따스함이 생기지 않았다. 시간이 만들어 줄거라 기대하며 관계를 지속해 나갈수록 내 안에는 정서적 교감이 없는 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말수가 적은 나는 그의 말을 듣는게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만 할 뿐 내 의견이나 안부를 궁금해 하지 않는 그를 보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고 나는 거기에 맞춰주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의견차이가 생길 때면 말로 풀어가려 하지 않고 싸늘해지는 그의 모습에 두려움과 불안감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내 민감함과 깊은 내면세계는 그에게 이해불가의 대상이었다. 논리와 사실에 입각해 세상을 사는 그와 감정과 직관을 통해 세상을 느끼는 나는 공통분모 하나 없는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었다. 내 본연의 모습을 이해 받지 못했으니 결국 나는 있는 그대로 사랑 받고 존중 받지 못한 것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그와 이별하기로 했다. 함께 있을 때 상대의 기분을 살피느라 진이 빠지고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 한 이 관계 속에서 나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무리 맞춰주어도 항상 더 애쓰고 노력하게 만드는 관계, 또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나 싶어 자책하게 만드는 관계 속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없었다.
자기애가 강한 그와 이별 후에 생채기 난 마음과 무너진 자존감을 회복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우선 그와 나의 감성적 코드가 맞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분명 멋진 남자였다. 능력 있고 매력적인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외향적인 그에겐 내게 감정적, 정서적으로 위안을 줄 수 있을 만큼의 마음의 깊이가 없었다. 나는 그가 갖고 있지 않은 부분을 아쉬워하면서 계속해서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그에게 사랑 받고 존중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관심을 얻어내려고 모든걸 그 사람에게 맞춰 주었다. 그렇게 할수록 내 자존감이 무너지고 스스로 내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를 떠올리면 '지킬앤하이드'가 생각난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이지만 내가 자기 말에 따르지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땐 무섭고 차갑게 돌변하는 사람. 다툴 땐 현란한 말솜씨로 모든게 내 잘못이며 다 내 탓이라는 결론을 내주었다. 항상 나를 야단치고 자기 말을 잘 듣도록 조련하는 듯한 그의 태도를 그때는 왜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나르시시즘 강한 그가 나를 통제하고 비난할 수록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나르시시스트는 마음이 닫혀 있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 상태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의 이런 면모를 눈치챈 이들이 없었기에 더 고민이 되었다. 나에게만 보이는 그의 거칠고 냉랭한 모습. 어째서, 왜, 나와 함께 있을 땐 불쑥 튀어나오는 모습이 남들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거였을까. 알고 보니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강하고 자기 주장이 확실한, 결연한 유형의 사람일 경우에는 어두운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이 여리고 섬세하며 상대의 입장과 태도에 큰 의미와 에너지를 부여하는 민감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민감한 상대방을 쉽게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기에 그 공격성과 이기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건강한 자기애라면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처럼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감탄할 때, 남들의 주목을 받을 때 자신의 존재감과 가치를 확인하는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불안과 낮은 자존감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인 그의 자신 만만함은 결국 포장되고 연출된 것이었다. 항상 자기 의견이 옳음을 남에게 관철시키고 자신이 옳아야만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 여기는 유형이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화를 내고 공격적인 언행을 보이며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와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내가 진이 빠지고 결국엔 모든걸 그 사람에게 맞춰주었던게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내 에너지를 모두 그에게 소비하면서 나는 그에게 점점 더 잘 휘둘리게 된 거였다. 그의 맘에 들려고 얼마나 눈치를 보았던가. 내 에너지와 마음이 모두 소진되어 없어질 때까지 내게 독이 된 그 관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도 못할 만큼 나는 압도당하고 있었다.
이렇게 쓰디쓴 깨달음을 얻고 나니 이젠 분명히 보인다. 나르시시스트와 민감인의 결합은 치명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다. 남에게 맞춰주고 항상 남의 입장과 감정을 먼저 챙기는 민감인은 자기 자신을 잃기 쉽다. 이런 성향은 나르시시스트의 자기애를 북돋아 주다 못해 결국엔 감정적 착취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가져가는 이는 끝이 없다. 주는 이가 그 한계에 부딪혀 나가떨어지기 전까지 그러한 관계는 계속 될 것이다.
유독 나를 정서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 성향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주변에 나르시시스트가 있다면 충분한 마음의 거리를 두고 가까이 엮이는 일은 피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 사람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친구이든 가족이든, 우월감과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과의 관계는 민감인에게 독이 된다.
민감한 사람들이 타고난 이타심과 섬세함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 또한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자신은 항상 옳고 남들은 항상 틀렸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르시시스트를 알아채고 거리를 두는 것, 가능하다면 발견하자마자 그 사람을 피하고 생활 반경에서 차단하는 것이 민감한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