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발 부산행 xx항공을 이용하시는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갑작스런 기체 결함으로 출발이 지연되오니 이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헛… 이게 무슨 소리야? 기체 결함이라니. 그럼 언제 출발한단 말이지? 출발 게이트 앞에서 비행기 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예상치 못한 변동 사항에 놀라 당황하고 있었다. 부산으로 출장가는 길이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미 잡혀 있는 미팅 스케쥴과 나를 픽업하러 공항에 나오기로 한 이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몇 시에 출발할 지 언제 부산에 도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뭐부터 해야하나… 팀장님께 전화해서 상황을 말하고 오후 스케쥴을 미뤄 달라고 할까. 아니야. 공항에 픽업 나오기로 한 직원들한테 먼저 알리는게 좋겠어. 괜히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니까… 그럼 점심은 나 빼고 먼저들 먹으라고 해야겠다. 나 기다리느라 식사까지 못하게 할 순 없지. 그럼 오후 스케쥴은 어떡하지.. 올라오는 시간도 미뤄야 할지 모르겠네…. 혹시 좌석이 없으면 어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에서 웨이브 치며 돌아 다닌다. 방송을 들은지 몇 초 안되는 짧은 시간에 나는 이미 그날 하루 일과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돌발 상황이 생기면 거침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과 고민거리들로 내 심장이 두근거리곤 한다. 순조롭게 해결되어야 할텐데… 혹시 오늘 다 처리 못하면 어떡하지….라며 하루 일과가 끝날 때까지 내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나는 기다리는 내내 출도착 스케쥴을 응시하며 초조해 하고 있었다.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아프다. 그때서야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게이트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다들 나랑 같은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에이씨….. 벌써 몇 분째야. 언제 출발하는지 정도는 알려 줘야 하는거 아니야."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목소리가 크다. 잔뜩 화난 남자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공항 직원에게 다가가 언성을 높인다.
"대체 언제 출발하는 겁니까? 사람을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거요? 내가 얼마나 바쁜데!"
자리에 돌아와서도 남자는 여전히 씩씩거렸다. 그렇게 화를 분출하는 사람 근처에 있자니 나까지 기분이 안좋아지려고 한다. 어딜 가나 큰 소리 잘 내는 사람은 꼭 있는 것 같다. 안그래도 불안한데 언성 높이는 사람까지 있으니 불안과 초초감이 배가 된다. 나는 조용한 곳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눈을 감고 쉬는 사람, 이어폰으로 음악 듣는 사람,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그저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기체 결함이라니 어쩔 수 없지뭐. 응. 지금 기다리고 있어. 괜찮아. 안 심심해. 책도 있고… 마침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잘됐지뭐. 응.~~ 걱정하지마."
와….. 어떻게 저렇게 평온할 수가 있지. 나처럼 불안해 하지도 않고 그 남자처럼 화를 내지도 않는다.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왕 기다려야 한다면 맘 편히 있자는 자세였다.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인도의 고대 의학인 아유르베다(Ayurveda)를 공부하면서 나는 내가 가진 기질과 체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유르베다는 인간의 육체, 정신, 영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한 전인적인 치유의학으로 자연과의 교감, 체질에 맞는 식생활,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중시한다. 흙, 물, 불, 공기, 에테르라는 5가지 원소가 자연을 구성하는 근간이며 지구상의 모든 물질은 이 5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유르베다에서는 우리 몸을 소우주라고 생각한다. 5가지 원소의 조합에 따라 바타(Vata), 피타(Pitta), 카파(Kapha)라는 3가지 바이오에너지 타입(Dosha)으로 우리 몸을 구분하고 있다. 바타 타입은 공기와 에테르, 피타 타입은 물과 불, 카파 타입은 물과 흙의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 세가지 바이오에너지 타입 중 어느 것이 더 우세하냐에 따라 사람의 기질과 체형이 결정된다고 한다.
아유르베다에 따르면 나는 바타 타입이다. 바타 타입은 골격이 가늘고 피부가 건조하다. 쉽게 피곤해지고 불안과 걱정이 많으며 따뜻한 음료를 즐긴다. 생각해보니 나는 한 여름에도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남들에겐 시원하게 느껴지는 사무실 냉방 온도가 내겐 가디건을 입고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다수를 위해 견뎌야만 하는 차가움으로 다가왔다. 왜 그리도 쉽게 지치고 쉬고 싶을 때가 많았는지, 무슨 일이 생기면 이를 어쩌나 싶어 걱정하고 또 걱정하고….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내 모습이 이제 다 이해가 된다.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에너지의 균형이 깨져 금방 탈이 나고 마는게 바타 타입이다.
출발이 지연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씩씩거리던 그 남자는 아마 피타가 우세한 타입이었을 것이다. 피타는 물과 불의 조합으로 지성 피부이면서 열이 많다. 차가운 음료를 즐기고 액티브하면서 경쟁심이 많기도 하다. 지적이고 언변이 좋으나 자칫하면 쉽게 기분이 상하고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이 욱하고 올라오는 분노라면 불처럼 뜨거운 피타 타입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덤덤하게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자기 할 일을 하던 사람들은 카파 타입이 아니었을까 싶다. 흙과 물의 조합인 카파 타입은 대체로 체격이 좋고 부드러운 지성피부를 가졌다. 그들은 느긋하다. 정이 많고 쉽게 용서하며 인내심이 있다. 활동량이 많지 않아 자칫하면 우울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유르베다에 따르면 개개인이 갖고 태어난 체질과 그에 따른 성향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항상 고민했던 내 모습이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였다니.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불안해 하지 않고 덤덤하게 아니면 남들처럼 당차게 문제를 뚫고 나갈 순 없는 건지 정말 오랫동안 생각해 온 나였다.
나는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존중하기로 결심했다. 나처럼 걱정이 많고 쉽게 불안해지는 바타 타입의 사람들에게 '불안장애'라는 그럴듯한 병명을 붙여 놓는다면 피타 타입은 '분노조절장애,' 카파 타입은 '게으름을 동반한 우울장애'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아유르베다 타입을 알게 된 후부터 나는 혹시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바꿨다. 일이 잘 안풀리면 불안해지는 건 내겐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겨울이면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손톱까지 파래지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여름엔 가방 안에 스카프와 가디건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모두 당연한 듯이 아이스커피를 주문 할 때 거리낌 없이 뜨거운 차를 주문한다. 이왕이면 불안감을 잠재워주는 허브티가 좋다.
"야, 한여름에 왜 그런걸 마셔? 덥지도 않냐?"
"난 이게 더 좋아. 나한텐 이게 보약이다~~"
나는 바타 체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