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마케터의 팬심 평행이론
'덕통사고'라는 말이 있다. 어떠한 대상이 한순간에 나를 치고 가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빠져든다는 뜻인데, 최근 몇 년간 브랜드도 팬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을 때 나는 문득 그 단어를 곱씹었다. 대체 아이돌도 아닌 브랜드가, 무슨 재주로 고객의 마음을 치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스타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인간일지언정 브랜드는 대체재가 너무 많고, (특히 내가 일하는 분야인 뷰티는 더더욱) 스토어든 온라인이든 빼곡히 진열된 상품들의 one of them인 우리가, 누군가에게 어떻게 '특별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건지. 처음의 나는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세상 많은 것들의 팬임을 자처하는 내가, 왜 우리 브랜드는 그렇게 못 만들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랜드 팬덤을 만들어보세요. 주어진 과제 앞에서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고, 내가 그 수많은 것들에 '왜' 빠졌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었던 계기를 살펴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팬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논리는 동일할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브랜드가 팬덤을 만들기 위해 준비해야 할 몇 가지 to do list를 적어본다.
떡밥을 끊임없이 줘야 한다
세계적인 그룹이 된 BTS에게는 다양한 성공 요소들이 있겠지만 그 발판이 되었던 건 바로 무한한 콘텐츠다. BTS는 데뷔 이후 끊임없이 자체 콘텐츠를 생산해왔고, 이는 누가 언제 BTS에 관심을 갖게 되더라도 유튜브에서 BTS를 검색만 하면 그들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짧은 비하인드부터 연습 영상, 자체 예능까지 작은 떡밥들은 모이고 모여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로 잠재적 고객이 어디에서나 우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다채로운 콘텐츠를 발신해야 한다. 콘텐츠라는 것은 어떤 유형의 영상이나 이미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이 많이 들어간 메인 영상일 수도 있고, 어떤 매거진에 실린 화보일 수도 있고, 유튜브에 달린 담당자의 센스 있는 댓글일 수도, 고객이 무심코 올린 스토리에 회신한 DM일 수도 있다. 다각도로 우리의 매력을 어필하면서 끊임없이 뉴니스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어디서 덕통사고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콘셉트는 바꾸고, 줏대는 지키고
가장 콘셉추얼했던 아이돌 그룹 하면 샤이니와 에프엑스가 떠오른다. 매번 새로운 콘셉트를 보여줬지만 사람들 머릿속에 아 이건 샤이니 같네, 에프엑스 같네 하는 관념을 심어주었던 그룹. 이는 그들이 코어를 지키며 다채로움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브랜드도 매번 바꾸어야 할 것과 계속 지켜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도 우리 브랜드스러움을 지켜야 한다는 (조금은 뻔한) 말이다.
2019년, 글로시에(glossier) 런던 팝업스토어에 갔을 때다. 문을 열자마자 글로시에다우면서도 런던의 위트를 한 스푼 넣은 인테리어에 놀랐고, 브랜드 프레이즈인 "Skin first. Make up second. Smile always."처럼 행동하는 크루들에 놀랐다. 매의 눈으로 무언가를 캐내러(?) 갔던 나는 원더랜드에 들어선 것처럼 이 브랜드에 홀려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에 휩쓸려 제품을 마구 테스트하고, 필요 이상으로 구매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는 바로 그 '줏대'에 있었다. 내가 온라인을 통해 접했던 그 얘기를 오프라인에서도 똑같이 하고 있으니 신뢰가 절로 생길 수밖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이런 사람이라고 주입해온 글로시에의 커뮤니케이션을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나는 덕통사고를 당했다. 심지어 와이파이 네임도 'Glossier Friends'였다. 커넥티드 된 순간 왈칵한 과몰입 마케터 아직도 우리 브랜드의 스토어 와이파이 네임이 SK_WiFi 어쩌고라면? 지금 당장 반성할 것.
지겨운 건 사실 우리끼리의 얘기일지 모른다. 브랜드에서 10년을 외쳐도 고객들은 모르는 게 태반이다. 끝까지 가져가고자 하는 것은 끝까지 지키는 줏대가 있어야 한다. 변화는 하되 변덕은 부리지 않는 브랜드 마케터가 되자.
결과보다 과정을 공유하자
비하인드 콘텐츠나 오프 더 레코드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프로페셔널 뒤의 솔직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언제나 성공하는 내 스타도 멋지지만 그 성공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비밀 얘기도 듣고 싶으니까. 그래서 팬에겐 결과만큼 과정 또한 큰 의미가 있다. 과정을 공유받으며 '내 최애의 성공에 기여한 나'를 다시금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듀스 101이라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무려 101명의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자 당신의 원픽을 골라보세요' 했으니 팬덤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그것보다 중요했던 건 바로 '국민 프로듀서'라는 콘셉트라고 본다. 내가 선택한 연습생이 데뷔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에 나의 참여가 절대적이라니. 마음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프로그램 내내 그들의 힘겨운 과정을 보여줬으니 또 한 번 자꾸자꾸 마음이 갈 수밖에.
"이거 진짜 쩔죠? 짱이죠?" 도 좋지만 "네, 저희가 이걸 쩔게 만들었고 짱으로 만들었는데 그걸 하는데에 얼마나 많은 과정이 있었냐면.." 하고 스토리를 보여주는 게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 즉 브랜드에 의견을 낸 고객들이 있다면 더 자발적으로 영업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있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뫄뫄가 이번에 데뷔를 했는데요 걔가 얼마나 짱이냐면요..
구질구질해지지 말자
브랜딩이란 결국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다. 잘하고 있는 브랜드를 따라 하는 것도, 트렌드를 맹목적으로 좇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최선을 다해 커뮤니케이션하고,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게 브랜딩이다. 앞서 '과정'을 보여주자고 얘기했지만, 그 과정에 애정을 구걸하는 장면이 있어서는 안 된다. 브랜드가 구질구질해짐과 동시에 고객의 판타지는 깨지고 만다.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는 브랜드 구성원의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시장을 선도하는 브랜드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ㅋ..' 라는 생각이 콘텐츠나 커뮤니케이션에서 느껴지면 안 된다. ㅋ..라고 월급쟁이의 머리로는 생각할지언정 정말 우리가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원래부터 그런 태생이에요. 우리는 이걸 세상에서 제일 잘해요. 브랜드 마케터는 브랜드를 의인화하고 끊임없이 영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피노키오야 일어나 보렴)
그리고 우리에겐 확신이 있어야 한다. 고집을 부리라는 소리가 아니다. A라는 길을 선택했다면 그 A에 누구보다 자신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도 없고 확신도 없다면?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팬, 즉 고객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자. 그 말을 듣고 이행하는 것만으로도 확신은 생긴다. 나를, 우리를 이미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