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끼리의 편안함을 넘어, 낯선 대화로
유유상종 — 끼리끼리 모이는 사람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와 성향이 맞고,
대화가 통하고,
대하기 편한 사람들과 어울린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대화가 통하면 피곤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서로의 말이 곧 서로의 생각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대화가 통한다”는 말은 결국 “생각이 통한다”는 뜻이다.
말은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삶을 구성한다.
따라서 대화가 통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같은 생각의 구조 안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낀다.
“아,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구나.”
그것은 곧 자기 존재가 인정받는 순간처럼 다가온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말했다.
“우리는 서로의 의견에 동의할 때, 그것을 진리라고 착각한다.”
비슷한 생각을 나누는 집단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한다.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각”이 되면,
그만큼 더 안전하고 확신에 차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끼리끼리 모이고,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 더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편안함의 이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옳은 것일까?
우리는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때로는 실수를 낳고, 실패를 만들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집단은 따뜻해 보이지만 동시에 배타적이다.
한 무리가 강해질수록 그와 다른 사람은 쉽게 고립된다.
‘왕따’라는 단어가 상징하듯,
유유상종은 언제든 한 사람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다.
“따뜻함은 냉정함을 낳고, 위로는 곧 배제를 동반한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말했다.
“다른 의견을 듣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끼리끼리 모이는 것에만 안주한다면,
결국 자기 생각의 벽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심리일까?
그는 자기와 닮은 사람을 찾는 대신,
자기 자신과 함께 있으려는 사람이다.
무리에 기대어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겉으로는 외로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과의 동행이 주는 충만함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집단의 힘을 빌려 자기 확신을 얻는 대신,
내면의 힘으로 자기 확신을 다진다.
그러니 혼자 있는 사람은
‘유유상종’의 질서에 어긋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상종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간다.
따라서 진정한 성장은 단순히 혼자 있거나,
같은 부류끼리만 모여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와 성향이 다르더라도,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 그들의 말을 들어보아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나의 생각을 되돌아보고,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해 나갈 수 있다.
다른 생각과의 충돌이야말로 성장의 가장 큰 동력이기 때문이다.
집단 속에서만 머무른다면 확신은 얻게 될지 몰라도, 발전은 멈출 것이다.
반대로 낯선 생각과의 마주침 속에서 우리는 더 넓은 시야를 얻고, 더 깊은 성찰에 도달한다.
결국, 유유상종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가두기도 한다.
혼자 있는 사람은 불안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가장 강하게 붙들고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혹시 너무 “끼리끼리”만을 찾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다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용기를 잃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을까?
오늘도 나는 '나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