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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괴물과 아버지, 그 사이

다연이 기억하는 두 얼굴

by 소망안고 단심

막내고모의 말에

다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대답을 할 힘조차 나지 않았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조용히, 아주 조용히

과거의 기억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어릴 때 기억하는 아빠는

짙은 쌍꺼풀에 오뚝한 코, 헌칠한 키.

사진 속 모습은 연예인처럼 잘생겼고,

젊은 시절엔 기타도 잘 치고,

직업군인으로 늘 단정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다연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만 해도

아빠는 월급날이면 양손 가득 통닭을 사 들고 오셨다.


다연이 무언가를 갖고 싶다 하면

낡은 도구들을 꺼내 직접 만들어 주던 손재주 좋은 아빠였다.


“우리 아빠가 제일 멋져!”

그때 다연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친구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랑거리를

아낌없이 품에 안고 살던 어린 시절이었다.


매미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던 여름밤.

집 앞 덧마루에 앉아

하모니카를 불어주던 아빠의 모습은

아직도 다연의 귀에 선명하다.


그 맑고 길게 이어지던 소리,

마치 세상 어디에도 슬픔은 없는 것처럼 들리던 그 순간.


물론, 술을 마시고 들어오던 날도 가끔 있었다.

그땐 그냥 “기분 좋은 아빠”였다.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다연을 안아 올리던 모습이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기분 좋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엄마를 향한 화가 손찌검으로 번지고,

다연과 동생들에게도 그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다.


술 냄새에 섞여 들어온 욕설,

탁자 위로 날아가던 술병,

깨진 그릇 조각들이 바닥에서 반짝이던 순간들.

그 모든 게 다연의 마음속에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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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직 어린 다연은

“왜 엄마는 아빠를 잘 맞춰주지 못할까?” 하고 생각했다.


엄마가 조금만 더 말재주가 있었다면,

엄마가 조금만 더 웃어주었다면,

아빠가 화내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


그렇게라도 누군가를 탓해야만

견딜 수 있었던 거다.

사춘기 무렵.

혼란스러운 어느 밤,

아빠는 술에 취해 다연을 불렀다.

탁자 위엔 소주병이 세 개나 비어 있었고,

방 안 공기는 술 냄새와 담배 연기로 무거웠다.


“다연아,

아빠는 네가 똑똑하고 믿음직해서 좋아. 넌 아빠 큰딸이잖아.”


다연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불편하게 시선을 돌리며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길 기다렸다.


아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낮게 말했다.

“아빠는 말이야… 너만 할 때 공부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는 큰아버지만 학교 보내고 아빠는 중학교도 못 다녔어.”

“맨날 손에 흙 묻히고, 농사짓고 일만 했지.

책 한 권, 교복 한 벌도 못 가져봤다.

그게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니?

그때부터 난, 늘 뒤처진 기분으로 살았다.”

그렇게 말하던 아빠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깨가 들썩이고, 목이 메이고,

마지막엔 눈물범벅이 되어 다연 앞에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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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다연은 아빠의 울음보다,

그 옆에서 진동하던 술 냄새가 더 싫었다.


그저 방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상한 밤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외딴집 이 씨 큰 딸.”

그 말은 늘 다연을 옥죄었다.

사람들은 다연을 보며

“아버지랑 똑 닮았다”라고 말했고,

그건 칭찬이 아닌 형벌처럼 들렸다.


닮았다는 건—

그 인간처럼 될까 봐 두려운 일이었다.

그 인간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 같기도 했다.


거울 앞에 서면 늘 자신을 의심했다.

“이 얼굴이 아빠를 닮았나?

내 성격도, 내 목소리도 그 사람 같을까?”

닮았다는 말은 늘 다연을 괴롭히는 족쇄였다.

하지만…

그 밤, 울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술에 절어 괴물로 변한 사람이 아니라,

좌절과 억울함을 껴안고 울던 한 인간.

그의 눈물은 단순한 연민이 아니었다.


그 울음은,

자신을 억눌렀던 가난과 자신을 외면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닮아버린 딸을 향한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이 뒤섞인 눈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연은 혼란스러웠다.

그 인간은 분명 괴물이었지만,

한때는 꿈을 꾸던 사람이었고

좌절을 견디지 못한 한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다연은 마음이 복잡해지고 흔들렸다.

괴물이자 동시에 아버지였던 존재.

그 사이에서 다연은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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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