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자란다.
가족들은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갈 준비를 했다. 아내는 아이들의 가을 옷을 챙겼다. 강원도는 금방 쌀쌀해질 것이다. 큰아이와 둘째를 꼭 끌어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아내에게는 조심히 운전하라고 당부했고, 차는 출발했다.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니 마음 한구석이 울적해졌다.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집은 쓸쓸했다. 가족들이 이렇게 내려가고 올라오는 걸 반복한 지도 수회를 넘고 있었다.
강원도 영월에서 농촌 유학을 시작한 지 이제 두 달 남짓. 아이들은 물론 우리 모두 만족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다양한 체험 활동이 제공됐고, 수도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리큘럼을 자랑했다. 무엇보다 모든 활동이 무료였다. 사춘기인 큰아이는 드럼을 배우고 있고, 예전에 손을 놨던 피아노도 다시 시작했다. 이번 중간고사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큰 성과였다. 둘째는 처음에는 조금 낯설어했지만, 조심스럽게 잘 적응하고 있다.
나도 종종 영월로 내려가 가족과 함께 지냈다. 특히 요즘 같은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의 영월은 정말 아름답다. 아내와 나는 매일 아침 커피를 들고 산책을 나갔다. 그냥 걷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 만큼 경치는 완벽했고, 공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선했다. 사업을 시작한 이후로 거의 매일 날카로운 감정에 휩싸여 살았다. 사소한 실수나 문제가 생기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밤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수두룩했다. 여유는 나에게 사치에 불과했다.
올해 초 사업을 재정비하면서 아내와 나는 앞날이 밝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큰아이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회사에서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면서 아내와 다툴 날이 많아졌다. 게다가 숨 막힐 듯 더운 여름은 피로와 짜증을 가중시켰다.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런 나에게 영월은 생각보다 많은 치유를 선사했다. 자연은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나에게 말했고,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영월은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분명히 바꿔놓았다.
농촌 유학의 시작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나 자신을 위한 대안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월에 내려가면 복잡했던 감정들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영월에서의 생활은 기대 이상이었다. 결국 아내와 나는 영월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집을 내놓고 영월에서 살 집을 구했다. 이제 40층 높이의 신축 아파트는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참고로, 영월에서 집을 구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정말 우연히, 운 좋게도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집을 계약한 날, 나는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월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한다. 그 변곡점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때 부자가 되고 싶었다. 물질적인 풍요와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영월에서 산책을 하며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부자라는 걸. 부자가 되는 목표보다 마음의 부자가 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벌써 가족들이 보고 싶다. 며칠 뒤면 주말이니 다시 내려가야겠다. 아내와 함께 걸었던 그 산책길을 다시 걸으며 이번 가을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